[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살며 생각하며 <2>

어머니 이야기 계속이다. 어머니의 친정 즉 내 외갓집은 ‘외갓집’이라는 곳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논길과 저수지 길을 지나 둬 식경 걸어야 닿을 수 있는 나지막한 고개 너머에 있었으며, 역시 그래야 되는 것처럼 입춘대길방(立春大吉榜)이 붙은 소슬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깔끔한 마당이 예배당 운동장처럼 넓었고 뒷마당에는 어른 두 사람이 감쌀 정도의 늙은 대추나무가 묵직하게 서 있었다.

기와지붕이 파란 하늘을 휘어지게 이고 있고 사랑채 옆 깊은 우물 속에는 뭉게구름이 솜이불처럼 떠가는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어머니가 시집온 시가집 즉 우리 조부님 댁은 변변치 못하고 한미한 집이었다. 살아생전의 조부님이 마을 사정이나 유래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어서 각종 대소사에 관여하였으며, 동네 수로에 다툼이 생기거나 상량식 같은 것이 안 풀리면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조부님 조언을 들어가곤 했다는 마을 사람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조부님은 ‘기침깨나 하는 향토 유지’급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대게 그런 분들이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것은 문중, 선영 같은 고색창연한 것들이다. 진중한 당골래와 경건한 유교와 낯익은 토속 신앙과 안온한 미풍양속이 적당하게 버무려진 그들의 조상모시기 방식은 그 찬란한 겉치레 때문에 서양 문물이나 기독교 사상에 의해 가혹하리만큼 격리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런 형식을 통해, 그런 정신을 통해 그들은 조상을 만나고 마을을 형성하고 자손을 퍼뜨리고 죽음을 준비해왔을 것이다. 김해김씨 문경공파(文敬公派) 후손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간직하면서 하얀 두루마기 입고 인근 해제면(海際面) 향교는 물론 멀리 경남 김해 수로왕(首露王) 능까지 출타하던 조부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런 당시의 우리 집은 잔치 때나 시제(時祭) 때 삼촌 고모 조카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모이면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집으로 시집왔는데 위로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시아버지와 시숙님, 밑으로는 철없는 총각 시동생들과 시집와서 포대기로 업어 키웠다는 당신 시누이이자 나의 막내 고모에 이르기까지 대식구가 즐비하게 한 집에서 또는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집에서 사시 절기에 맞춰 농사짓는 일에서부터 때 맞춰 시제, 기제(忌祭) 지내고 시동생 시누이 시집 장가보내는 일은 대갓집 며느리로 들어온 여인이 해야 할 숙명이자 팔자였다. 허나 세월은 흘러 산천은 의구하되 형제들은 하나 둘씩 저 세상으로 갔고 남은 이는 거동 불편한 시누이와 서울 신당동에서 아파트 경비일 하는 시아제 한 분이니 어머니의 주위가 갈수록 허전하리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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