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미 안산타임스 기자
김종미 안산타임스 기자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설날’ 즈음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동요 윤극영 선생이 작사 작곡한 ‘설날’ 이다.

이 동요에 따르면 ‘우리 설날’은 정월 초하룻날, 음력으로 한 해의 첫째 달의 첫째 날인 오늘이지만, 까치의 설날 ‘어저께’(어제)는 섣달 그믐날,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의 마지막 날인 어저께다.

그런데 ‘까치설날’은 왜 ‘어저께’일까? 그리고 뜬금없는 까치의 등장과 ‘까치설날’의 유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무속·민속 연구 권위자였던 고(故) 서정범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섣달 그믐날은 ‘아찬설’ 또는 ‘아치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찬’, ‘아치’는 순우리말로 ‘작은(小)’을 뜻하는 말인데, 설 전날을 ‘작은 설’이라는 뜻으로 ‘아치 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추석이 ‘한가위’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설은 ‘한설, ‘한첫날’로, 작은 설은 ‘아찬설, 아치설’로 불리다 세월이 흘러 '아치'가 뜻을 상실하며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서 교수는 우리나라 남서해안 다도해 지방에서 ‘조금’을 부르는 말이 변한 것을 예로 든다. 조금은 조석 간만의 차가 가장 작을 때를 말하는데 뱃사람들은 이를 ‘아치 조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충남 태안반도와 황해도 옹진반도 사이에 있는 경기만 지역에서는 이 ‘아치 조금’을 ‘까치 조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많이 알려진 설은 고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설화를 바탕으로 한 민속학자들의 주장으로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려 했는데 까마귀와 쥐, 돼지, 용 등의 도움으로 이를 모면했다.

소지왕이 쥐, 돼지, 용 등은 모두 십이지에 속하는 동물이라 그날을 기념하지만, 까마귀만은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마귀의 날’이라 정해주었는데 그 ‘까마귀’가 훗날 ‘까치’로 와전되어 전해져 왔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윤극영 선생이 작사·작곡한 ‘설날’을 발표한 시기가 일제 강점기인 1924년으로 윤극영 선생은 일본에 우리말과 동요까지 빼앗긴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 동요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양력 1월 1일 ‘신정’을 설날로 쇠던 일제를 까치로 비유했고, 우리 민족의 설날인 음력 1월 1일보다 앞선 시점이기 때문에 ‘어저께’라고 말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윤극영 선생이 우리 민족에겐 희소식의 상징인 가치를 일제의 설날인 ‘까치의 설’로 비유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네 번째 글자의 자음이나 독음이 비슷한 경우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해음현상(諧音現像)’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자적 해음현상이란 까치의 한자어는 ‘작(鵲)’인데 이것이 어제라는 말의 ‘작(昨)’과 음이 같아서 ‘어저께’와 ‘까치’를 동의어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섣달그믐’은 전통적인 음력 12월의 명절로서 ‘대회(大晦)’라고 하며 이날을 ‘작은 설’이라고 하여 묵은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예로부터 전해져 왔다.

이를 토대로 유추한다면 섣달그믐날인 ‘작은 설’은 정월 초하루의 어제이므로, ‘어제 작(昨)’ 자와 발음이 같은 ‘까지 작(鵲)’ 자로 치환하여 ‘어저께의 작은 설날은 까치의 설날’이라 하고 ‘오늘의 설날은 우리의 설날’이라고 문자 유희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서양에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길조(吉兆)의 상징 까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믿었다. 까치는 실제로 시각과 후각이 뛰어나 주위의 냄새는 물론 사람의 냄새까지 기억한다고 한다.

이처럼 설날엔 온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까치가 설날 동요에 등장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또 까치의 무늬와 비슷한 색동저고리를 설 전날에 준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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