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고양시 예술고등학교 3학년 최수연

그는 어느 서재에 꽂혀있던 책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가벼워진 몸을 느낀 그는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탁해진 팔과 다리 사이에 새겨진 글자들은 선명했으나 몸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구겨졌다 펴졌을 때 생긴 듯한 직선 자국들이 더는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의 몸과 몸에 새겨진 글자들은 확연하게 구분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걸음을 재촉하며 끝이 정해져 있는 책장 한 칸 안에 길을 걸었다. 그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은 책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들은 그처럼 매우 급하게 긴 거리를 걷지 않았다. 책에서 나온 사람들은 시간이 사라진 또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아주 느린 걸음을 가지고 자신이 나온 책 옆에 있는 다른 책으로 향했다. 그와 그들이 걷는 길에서는 책의 옆면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책의 제목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두께 감만으로 자신들의 끝을 결정해야 했다. 그의 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몸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들은 불규칙하게 나열된 문장들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그 사람의 과거였다. 글자가 사라지지 않고 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끝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꽂혀있는 책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끝을 마주하며 스스로가 느낄 수 있었던 일종의 감각이었으며,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쉴 틈 없이 걷던 그는 네모난 나무 널빤지가 세워진 길의 끝에 다다랐다. 끝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서 첫 번째로 꽂혀있던 책 앞에 두 발을 딱 붙이고 섰다. 옆 책의 삼 분의 일도 안 되는 얇은 책이었다. 그는 그 책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책으로 들어갈 때는 책 속에 없는 부분이 책 일부가 되겠다고 들어가는 꼴이니 몸이 쉽게 구겨졌으나, 그의 몸은 구겨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투명해진 몸에, 그는 구겨질 수조차 없었다.

그는 책 속에서 사십 대의 여자와 남자의 딸인 바퀴벌레가 되었다. 책 내용의 초반에서 그들의 딸은 열 살 여자아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딸이 바퀴벌레가 되었다는 설정이었다. 그들의 딸이 바퀴벌레가 된 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엄마는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되면 어떨 거 같아?”

딸은 간절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봤고, 딸의 엄마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우리 딸인데, 당연히 키우면서 살아야지.”

“밥도 줄 거야?”

“그럼,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딸의 엄마는 정말 딸이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기겁을 하며 슬리퍼로 딸을 내려찍었다. 콱 찍어 눌러 비벼서 몸통을 으스러트렸고, 꿈틀거리는 딸 위로 뭉텅이로 말아버린 휴지를 던져놓고 손바닥으로 탁탁 쳐댔다. 남아있는 숨통까지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바퀴벌레가 된 그는 자신을 죽여버리겠다는 딸 엄마의 거친 손길을 느꼈다. 콱 눌리고 탁탁 찍혀지며 죽어갔다. 더는 숨조차 쉴 수 없겠다 싶을 때 온몸의 모든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왔다. 여자아이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는 더 투명해진 몸을 이끌고 책에서 나왔다. 손을 쥐었다가 펴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글자들은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 그는 책에 기대어 앉아 여자아이의 끝을 되새겼다. 엄마로부터 비롯된 딸의 감정들이 온몸에 퍼지면서 달아오른 채 끝으로 가까워지던 감각. 그는 살아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높은 건물에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채 떨어져 버렸던 자신과 떨어지기 직전에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던 자신을.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어떠한 책 일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도 끼워 맞춰질 수가 없다고. 그는 투명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투명한 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마치 그의 기억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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