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서울시 관악구 신림고등학교 3학년 박보람

 

달궈진 프라이팬 안에서 당근과 양파가 연기를 내며 춤을 췄다. 나는 뒤를 돌아 동생을 보았다. 동생은 주황색과 검은색 크레파스가 잔뜩 묻은 손으로 춤추는 당근과 양파를 스케치북에 그렸다. 그리고 요리하는 언니의 뒷모습까지 그렸다. 스케치북 속 언니는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를 입고 채소를 볶고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손을 씻으라고 말했다. 동생은 집 안의 화장실을 들어갔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빨리 돌아오라는 나의 말을 듣고 동생은 옷을 따뜻하게 껴입고 핫팩을 챙겨 나갔다.

그날의 언니도 지금의 나처럼 잡채를 만들고 있었다. 당근을 썰고, 양파도 썰고. 간 고기를 준비했으며 맛있게 볶았다. 미리 삶은 당면에 볶은 채소들과 양념이 된 고기를 넣어 손으로 잘 섞었다. 주방에서 더 많은 준비를 했겠지만, 우리가 본 요리 장면은 이것이 다였다. 언니는 나에게 깨를 넣어보라고 했다. 나는 깨 통을 위아래로 흔들며 잡채에 고소함을 담았다. 언니는 나와 동생의 식판에 잡채를 덜어주었다. 며칠 전부터 잡채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동생은 신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잡채를 흡입했다. 나도 제일 좋아하는 시금치를 골라 먹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언니는 부모님이 사리진 이후 몇 년 동안 나와 동생을 혼자 보살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언니를 우리의 부모님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니는 착하고 성실했으며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그날 음료수를 사러 나간다며 지갑과 캐리어를 들고 가는 것을. 그렇게 언니는 1년 동안 볼 수 없었다.

그날의 잡채는 정말 맛있었다. 당면을 삶기 전에 불리지 않아 맛이 따로 놀았던 것 빼고는 팔아도 손색없을 정도의 맛이었다. 이젠 나도 혼자 요리를 하고 동생을 보살필 수 있는 나이였다. 사실 그전에도 그럴 수 있는 나이였지만 거의 언니가 해주었었다. 나는 잡채를 먹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잡채를 만들었다. 당근을 썰고, 양파를 썰고, 버섯도 썰고…. 썰어놓은 재료들은 크기가 엉망이었다. 입에 들어가면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 프라이팬에 넣고 볶았다. 이제 크기도 굽기도 제각각인 재료들이 되었다.

나는 언니가 했던 조리법을 최대한 생각하며 비슷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당면을 삶고 고기를 재웠다. 채소를 볶았던 프라이팬에 고기도 볶고 당면과 재료들을 섞었다. 나는 어느새 돌아온 동생에게 깨 통을 쥐여주고 한번 뿌려보라고 말했다. 동생은 신나게 깨를 뿌렸다. 나는 모든 재료가 든 잡채를 열심히 섞었다. 다른 재료들이지만 잡채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도록.

동생은 내가 만든 잡채를 한 입 먹더니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잡채를 크게 한입 넣었다. 당면은 바삭바삭했고 당근과 양파는 흐물흐물했다. 고기는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태워져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재료가 모두 따로 놀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생에게 다음에 다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생은 잡채를 뒤적거리더니 왜 시금치가 들어있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잡채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잡채 안 재료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잡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다 다른 재료들이 모인 것이었다. 가족도 결국은 남이었다. 언니는 우리와 나이 차가 크게 나서 이 사실을 빨리 깨달은 걸까. 다시 잡채를 입에 넣었다. 여전히 잡채는 따로 놀았다. 나는 계속해서 잡채를 씹고 또 씹었다.

동생에게는 결국 라면을 따로 끓여주었다. 동생은 라면의 국물까지 모두 마시고 기침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와 생수병 2개 밖에 없었다. 동생은 나를 보며 음료수가 마시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과 지갑을 들었다. 동생에게는 음료수를 사 오겠다고 말했다. 그때 동생이 잠시 기다리라며 나를 붙잡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렸다. 손에든 지갑이 무거워 질 때쯤 동생이 양손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동생이 나에게 내민 작은 손에는 초록색, 하늘색, 갈색의 여러 지폐가 놓여 있었다. 동생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이번 음료수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사라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나 또한 웃으며 동생에게서 돈을 건네받았다. 현관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닫힌 집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의 옆에는 작은 하늘색 알루미늄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나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따뜻했다. 나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놓고 마트로 향했다. 잡채의 재료를 다시 사야겠다. 그리고 잡채를 다시 만들어야지.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도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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