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경기도 안산시 김나형

 

쨍한 햇볕에 눈을 질끈 감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할 만큼 쓸데없이 환히 빛나는 저 하늘의 햇빛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병원 밖을 나서는 내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고 힘들기만 하다.

몇 걸음 걸어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 다다르자 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후우...' 버스정류장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내 한숨 소리에 나를 슬쩍 한번 바라본 후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다.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 중 사연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자신들과 비슷한 그 심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듯 근심 가득한 얼굴 저마다 하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배차시간이 길었던 노선은 휴일이라 그 간격이 더 길다. 막연한 기다림이 싫었다. 급한 성격에 복잡한 마음까지 더해 내 발은 정류장을 벗어나 어느새 보도블럭을 걷고 있다. 답답했던 마음이 두 다리에게 '좀 걸어라' 라고 명령을 내린 듯 했다. 가까운 거리도 차를 끌고 다닐 정도로 게으른 나였다. 그런데 이날따라 두 다리는 왜 자기 멋대로 걸음의 여정을 시작했을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발바닥이 점점 불편해지더니 이내 이질적인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발가락 두개에 아슬하게 걸친 슬리퍼를 신었다는 것을 바보처럼 뒤늦게 서야 깨닫는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가서 버스를 탈까. 아니면 가던 길 계속 가볼까. 마음은 갈팡질팡 우유부단 했지만 오늘따라 제멋대로인 내 다리는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가길 고집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초점 잃은 내 두 눈을 살짝 스쳐 지나간다. 땅만 보며 길을 걷는 내게 고개 좀 들어보라며 바람이 툭툭 건드려보는 듯 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앞을 바라본다. 그제서야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날임을 증명 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청록의 푸른 벚나무들이 내가 걸어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화사하게 만개한 봄의 연분홍 벚꽃만이 벚나무에 대한 나의 편협 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다. 다른 색을 입은 모습도 기억해주길 바랐던 걸까. 푸른 벚나무들은 저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와 가지를 흔들며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매일 같이 차로 달리며 스쳐 지나던 이 길.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 가보니 오색 자연을 담고 있었다.

어느덧 즐비한 주택 단지의 사잇길과 어딘가를 향한 오르막 계단의 갈림길에 섰다. 비치된 안내표지판을 보니 계단의 길은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처럼 보였다. 슬리퍼를 신고 적지 않은 거리 걸어왔더니 발은 아팠고, 따가운 햇볕 덕분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무작정 계단 길에 올랐다.

곧게 뻗은 소나무 하나 둘 지나고 나니 어느새 깊은 산중에 접어들어 있다. 지름길인 줄 알았더니 그 오르막 계단은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 되는 일 정말 없네.' 입에서는 세상 짜증스러운 말이 튀어 나온다. 미끌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마음에도 없던 산을 오를 줄 누가 과연 알았을까. 좀 전의 갈림길로 다시 내려갈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편한 길이 낫지 않을까. 미련 가득한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내 머리가 갑자기 싫어진다. '탁' 정신 좀 차려질까 하는 심정에 손바닥으로 머리를 한대 때려본다.

그래도 가던 길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산행에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쉬운 내리막길 보다는 조금 고생스러운 오르막길로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이 산은 분명 어느 동네의 뒷산 일 텐데 이름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잠깐 멈춰서 지도를 검색하려 핸드폰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그 손을 내려놓았다.

어디 산이 뭐가 중요할까. 잠시 스쳐 지나는 산의 이름이 뭐가 되었든 지금 이 순간 넘어서면 그만이다. 산의 조붓한 오솔길은 내가 뒤로 가려 마음먹지 않는다면 오롯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만 있다. 이 길과 내 발걸음에 의지해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어느덧 정상에 이르렀다.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숨을 내쉰다. 어이없게도 정상의 나무들보다 주변 아파트와 상가의 빌딩들이 더 높다. ‘힘들다. 힘들다.’ 말하며 바닥만 보고 올랐던 이 산(고난)은 사실 그 어느 산도 아닌 단순히 어디로 이어지는 그냥 '길' 이었다. '하하하.' 어이가 없었는지 내입에선 웃음이 나왔다.

정상에는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생활 운동기구들이 있다. 누구나 언제든 오고 가는 단순한 산책로. 마음에 스스로를 옭아 맨 잡념들 가득 채워 오르니 내 발걸음 무겁고 힘들다 착각했나 보다.

맑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내 눈에 들어온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조금 더 걸으니 어느새 '문'에 다다른다. 문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주변 모습은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분명했다. 오는 내내 길을 잘 못 들은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힘들기만 한 이 행로의 끝이 처음 보는 낯선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두려웠다.

시원한 아카시아 향의 바람이 내게 불어온다.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꽃의 향기는 내가 내쉬는 '숨' 어느 순간에 이따금 향기로움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다. 밝게 웃으며 반갑게 반겨주는 아내와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편안함에 이르렀다. 모두가 잠이든 고요한 시간과 공간에서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담아 맹세를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그 ‘이유’가 고난과 고통이라는 날카로운 칼과 창이 되어 우리 마음 피폐하게 만들지라도 이처럼 그 순간 넘어서면 웃으며 ‘별 것 아니었다.’ 말하리라. 시간이 지나 지금의 순간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좋은 날들 이었다.’ 추억 하리라.

‘지금의 삶’, ‘지금’이라는 이 감사한 순간을 내 모든 생애 중 가장 아름답고 찬란히 빛나는 삶 이었다 당당히 말하리라. 좋은 부모 만나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 소중한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이 순간들을 영원토록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결코 내 아이의 발달 장애가 내 삶에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수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생애를 다시 선택하고 한없이 사랑하며 모든 순간 감사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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