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인천시 원당고등학교 3학년 마 린

 

땅에 떨어진 꽃씨 하나를 주웠습니다. 정확히는 우리집 강아지 뽀삐가 무언가 삼키려던 걸 급하게 말린 거였지만요. 나는 쭈그려 앉아 지퍼백 속 담겨있는 것들을 요리조리 살폈습니다. 뽀삐의 끈적한 침과 날카로운 이빨을 이겨낸 작은 알갱이들이 무엇인지 궁금했어요. 고개를 들자 펼쳐진 풍경을 본 순간 이것의 정체가 씨앗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 머리 위에는 길게 뻗은 덩굴이 가득했습니다. 꽃으로 피어나 함께 어울리고 싶었을 텐데. 차마 그러지 못하고 줄기에서 떨어졌나 봅니다. 나는 씨앗을 입바람으로 닦아낸 뒤, 주머니에 쑤셔 넣습니다. 괜한 책임감인지, 옆에서 용맹하게 짖어대는 뽀삐의 울음소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엄마, 왜 혼자 여기까지 나왔어. 강아지는 또 왜 데리고 나온 거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여자가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녀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네요. 나를 거세게 움켜쥔 손길에 손목이 시큰거립니다. 그래도 내 주머니 속에는 담긴 꽃씨를 생각하니 어딘가 든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꽃씨가 내 손안에 들어온 첫날. 내 모든 노력은 콩알만 한 꽃씨로 쏟아졌습니다. 동네 꽃집 아주머니에게, 아랫집 할머니에게, 하다못해 인터넷 지식왕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값비싼 영양제를 구매해서 꽃씨에게 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탄식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주일 전만 해도 싹이 움틀 기미가 보였거든요. 언제쯤 싹이 날까 싶어, 애꿎은 꽃씨에게 손가락질도 해보고 한탄도 해봅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꽃씨가 꽃으로 피어나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아니, 영원토록 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딱 한 번만, 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언제쯤 필까……."

윤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가족도, 친척도 버린 씨앗은 윤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모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윤주를 바라볼 때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5년하고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윤주는 꽃씨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 꽃씨는 그런 윤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4년 전쯤 어디선가 주워온 꽃씨만 베란다에서 열심히 키웠다. 무럭무럭 자라난 넝쿨은 베란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꽃을 피워내진 못 했다.

“언니, 언니! 이거 봐봐. 우리 딸 윤주. 예쁘지?”

윤주는 매일 자신의 어릴 적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하루에 두 번씩 빨래를 돌려야 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먹지도 않을 된장찌개를 끓여야 했다. 베란다를 점령한 넝쿨이 거실로 넘어오지 못하게 줄기를 자르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팔에 근육통이 올 정도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야 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혹여나 연약한 꽃씨가 삐쩍 마르지 않도록 겨울을 준비하는 법을 알려주어야 했으니깐.

“엄마, 내가 처음 끓여준 된장찌개 기억나? 한번 먹어봐. 엄마 좋아하는 고기도…….”

“언니 싫어! 언니 말고 우리 윤주. 윤주가 해준 거 먹을래.”

윤주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미경의 양손에 쥐여주었다. 식탁 위의 된장찌개와 어묵볶음이 온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미경이 윤주 표 된장찌개를 내놓으라며 징징댈 때, 이에 윤주가 바로 눈앞에 있다며 버럭 소리를 질렀을 때, 윤주는 그때부터 이유 모를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미경을 뒤로한 채 설거지를 마무리하는 건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잘 해낼 수가 없었다. 눈물은 앞을 가렸고, 훌쩍대는 콧소리는 미경의 투정에 묻힐 뿐이었다.

*

엄마는 이제 넝쿨에 물을 주는 거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꽃씨에 물을 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꽃이 피지 않더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작은 싹이 움트더래도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나는 꽃씨 덕분에 덩굴의 예쁜 꽃으로 피어났으니까요. 이제 내가 꽃씨를 보살필 차례입니다. 묵묵히 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가 끝날 때, 나는 주문을 외우며 잠에 듭니다. 꽃을 피우진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싹을 틔울 거라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언제나 함께할 거라는 주문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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