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강원도 속초시 이수민

 

그 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하이얀 진눈깨비로 변하던 밤, 우산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이고 말없이 걷던 밤. 나는 알았다. 어쩌면 그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유를 알 수 없던 그 밤의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피하고 싶은 진실, 외면하고 싶은 직감이 만들어낸 공포.

눈 떠보니 온통 새하얀 세상이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눈은 다음날 아침까지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오래도록 손꼽아 기다려왔던 눈이었건만, 달뜬 마음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도 나는 쉽사리 작은 탄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밤사이 그가 떠나며 남긴 것을 감히 선물이라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느새 저만치 쌓인 눈처럼 소리도 없이, 꾸준히도, 외로이 벌였을 그의 사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렸다. 그의 마지막 숨결로 피워낸 눈꽃이 속도 없이 예뻤다. 아름다웠다.

단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는데 나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제 나는 결코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를 잃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앞에서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커다란 제설차는 시끄러운 경고음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눈 쌓인 바닥을 마구잡이로 긁어댔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인 도로 위를 나는 그저 걸었다. 신경질적으로 나를 들쑤시는 소음 한가운데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뭐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단 한발작도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상실의 아가리 앞에서 내가 세운 문장은 내쉬는 한숨에서도 상실이 묻어나왔다. 쏟아진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얽히고설켜 눈 위를 나뒹굴었다. 어지러이 뒤섞인 생각들을 주워 담으며 그 길을 참으로 오래도록 걸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 길 끝에 있는 그와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쿵 소리를 내었던 것이 가까스로 내게 붙어있던 마음이었나. 나는 생각해본다. 그때 들었던 말들이 그 마음에서 외쳐 나오던 것이었나. 생각을 이어가본다. 이대로 그만 달아나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자고. 그럼 모든 게 괜찮아질지 모른다고. 나를 달래고 유혹했던 그 말들을.

그런 식으로 그와 마주하는 날이 오게 된다는 건, 그래, 마음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모든 게 낯선 그곳에선 나라는 사람마저도 내게 낯설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왼쪽 머리맡에 하얀색 리본이 달린 핀을 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는 어제의‘나’가 아니었다. 거기에선 나도 나의 얼굴을 몰랐다. 거울에 비친 내가 두려워 내내 거울을 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작은 액자 속 그의 얼굴과 이름뿐이었다. 액자 속의 그가 여전히 내가 아는 그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당장이라도 달려와 내 어깨를 감싸 안아줄 것 같은 그는, 더 이상 병실에 누워 거친 숨소리를 내뱉던 중증의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 모든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제야 그에게 도착했건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그를 찾아 헤맸다.

그러니까 그와 나누던 인사는, 어쩌면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 그 끝을 애원하듯 붙잡고 있었지만, 이젠 그를 보내야만 할 때였다.

눈처럼 하얗지만 거칠거칠했던 그의 마지막 옷. 그 아래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두 손. 깊은 잠에 빠진 것만 같았던 얼굴. 더 이상 시끄럽게 코를 골지도, 고른 숨소리에 맞추어 배가 오르락내리락 하지도 않던 평온. 두 뺨에서 느껴지던 감촉.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서늘한 냉기.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절실한 기도였다. 유난히 귓불이 두툼했던 귀만큼은 아직 작은 온기가 남아있길. 내가 말하는 사랑이 그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의 마지막 길이 모두의 사랑 속에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기를.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기억 속에 남은 그의 온기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잊지 않아야 했다. 그의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의 마음이 얼마나 푸근했는지, 그의 말투가, 그의 눈빛이, 그의 미소가 얼마나 다정했는지를. 그의 마지막으로 기억 속의 모든 순간이 뒤덮이게 두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유난히 추운 겨울, 마지막 숨결로 피워낸 아름다운 눈꽃을 남기고, 그는 내 곁을 떠났다.

그러나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던 그 밤은, 나에게 그 어떤 날보다 따뜻한 겨울로 기억될 것이었다.

어느새 찾아올 봄처럼. 얼어붙은 땅에서도 꿋꿋이 피어날 들꽃처럼. 어디선가 불어올 따스한 봄바람처럼.

저작권자 © 안산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