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경기도 부천시 조열래

 

“환자분 눈 떠 보세요. 제가 하는 말 들리시죠?”

친정아버지께서 눈을 뜨셨다. 2주 만이다. 의식이 돌아오자 의사와 간호사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상태를 체크했다. 간호사가 산소호흡기를 떼어냈다. 의사는 자가 호흡이 되고 다른 증상도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이 병원 침대 발치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라는 간호사의 말에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섰다. “아빠, 저희 왔어요.”라고 하자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한참을 뒤척였다. 비몽사몽간에 뵈었던 친정아버지의 모습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애써 꿈속을 더듬었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떠야 하나?’ 베갯잇이 흥건하게 젖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생생했던 꿈의 조각들을 하나둘 맞춰보았다.

코로나19가 평온했던 일상을 앗아갔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입원 환자의 면회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요양원에 계실 때 한 달에 두 번씩 면회가 가능했었다. 그것도 예약해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겨 연희동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카스텔라를 한 조각이라도 드시게 하고 싶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을 뵐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를 뵈러 간식을 준비해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오고 가면서 두 달을 보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뒤,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결국 걸으실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 아버지의 운동화와 지팡이만 쓸쓸히 우리 집 현관을 지키고 있었다. 영양을 잘 섭취하면 힘이 나서 걸으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2021년 6월 26일, 삼 남매가 아침 일찍 아버지께서 누워 계신 요양병원을 찾았다. 간호사가 “새벽부터 아무것도 못 드시고 호흡이 안 좋아지셨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로 호흡하며 눈을 감은 채 누워 계셨다.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마음이 답답하고 속이 타는 듯 아렸지만, 어떻게 해드릴 도리가 없었다. 담당 의사가 하루 이틀 지켜보고 대학병원으로 모시자고 말했다.

이틀 뒤였다. 이대 서울병원에 입원하셨다. 병명은 급성신부전이었다. 의사가 혈액투석만이 치료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힘든 치료이기에 고통만 드리는 것 같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점점 기력을 잃어 가더니 2주일 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셨다. 동두천 왕방산 자락 예래원 공원묘지에 묻히셨다.

내가 열 살쯤 때의 일이 아련하게 기억난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양푼을 머리에 이고 묵을 팔러 오시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직접 도토리를 따고 가루를 빻아 묵을 쑨다고 하였다. 생전의 아버지께서는 그 아주머니의 도토리묵을 특별히 좋아하셨다. 도토리묵에 간장 양념을 올려 드리면 맛있게 드셨다. 얇게 채 썬 청포묵에 숙주나물, 달걀지단과 김 가루를 올려 참기름에 무쳐드렸다. 이제는 추억 속의 그리운 음식이 되었다.

세상살이는 여전히 분주했다. 퇴근길 집 앞에 있는 마트에 들렀다. 두부 부침을 할 생각으로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두부가 냉기를 맞으며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위 칸을 보니 청포묵과 도토리묵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도토리묵을 보는 순간 아버지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상표가 ‘왕방산 도토리묵’이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포장지에 검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제조처가 ‘경기도 포천’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유택이 있는 왕방산에서 자란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묵이었다. 고향 땅이 아닌 낯선 곳에 홀로 계실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무심결에 왼손으로 묵을 집어 들고 뚫어지게 보았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에 들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두 손으로 도토리묵을 받쳐 들었다. 아버지 묘소의 상석을 닦던 날이 엊그제였는데, 왕방산이라는 지명을 보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움직일 수 없었다. 포장된 도토리묵의 촉감이 차가웠다. 그리움이 복받쳤다. 가슴이 답답하고 몽클했다. 슬그머니 눈물을 찍어 눌렀다. 왕방산 자락에 계신 아버지의 묘소에서 느끼던 냉기와 같았다. 마치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신 듯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토리묵과 두부를 포장된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정신이 나간 듯 한참을 서 있었다. 아버지의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생전의 아버지 손은 참 따뜻했었다. 갑자기 저 차가운 냉장고에서 묵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차갑게 누워 계셨던 아버지를 모시고 나와야겠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냉장고 앞에서 서성이며 꿈인 듯 생시인 듯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첫 번째 생신을 맞았다. 가족이 함께 아버지 산소에 가기로 했다. 추석에 갔을 때 화병에 꽂아두었던 조화 색깔이 바래 마음 아팠다. 핏기 가신 꽃들은 목숨을 다하여 수의를 입은 듯했다. 빨강과 파란색의 묶음 꽃들은 뙤약볕 아래 무수히 내리는 눈비를 맞으며 아버지를 위로했을 것이다. 자주 찾지 못하는 자식을 대신해서 그리움을 달래며 속삭였을 테다. 향기가 없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지 못하지만, 햇볕을 즐기며 꽃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밤이면 별들과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로움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 땅에 묻혀 계신 친정엄마의 묘를 아버지 묘소에 합장하기로 했다. 길고 길었던 이십육 년이라는 그리움의 세월을 지나 친정 부모님께서 영혼이 되어 유택에서 만나실 예정이다. 삼 남매가 함께 한자리에서 두 분께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두 분의 영혼이 함께 하실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설레는 봄이다. 부모님이 함께 계신 왕방산 유택으로 아버지께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도토리묵을 준비하여 상석에 올릴 생각이다. 청춘을 보낸 조화는 사르고, 예쁜 꽃으로 단장할 채비를 하여야겠다. 올해도 왕방산 자락에 꽃이 피었다 지고 도토리가 열릴 것이다. 도토리묵은 친정아버지와 추억이 담긴 내 영혼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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