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
경기도 안산시 박태희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살아 있는 것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혼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장독대에다 절을 하고, 동네 입구 배나무 아래 돌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오래 지니고 있다 보면 어떤 정신적 유대가 형성되는 것일까. 손때가 묻은 몽당연필이나 닳아 버린 감자 까던 숟가락, 반쯤 타고 남은 부지깽이. 그런 시간의 흔적이 특별한 그리움으로 우리 무의식에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느질을 할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빤히 쳐다봐. 뒷산이나 다녀와요.

반짇고리에서 골무를 꺼내며 아내가 하는 말이다. 요즘은 바느질이 흔치 않다. 구멍 난 양말 따위를 기워 신지도 않거니와 어지간한 것은 수선집에 보내는 편리를 쫓기 때문이다. 새삼 골무가 신기하다. 골무는 바느질할 때 바늘이 손가락 끝을 찌르는 것을 막고 바늘이 잘 들어가도록 밀어 넣기 위해 끼는 바느질 도구다. 작은 반달 모양의 손가락 감투 골무. 집게손가락이 골무를 만나면 바늘을 통해 또 하나의 사물이 완성된다.

어릴 적, 어머니가 골무를 끼고 바느질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골무는 화려하지 않았다. 광목 몇 장을 포개어 소박하게 만들었다. 요즘처럼 소품으로 만든 것에 새겨지는 사군자와 모란 등 무늬는 어림도 없다. 더구나 보통의 골무보다 뭉텅하게 만들어 썼다. 다친 손가락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여물을 썰기 위해 작두질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끝마디가 잘린 둘째 손가락은 상처가 아물면서 뭉툭해졌다. 그 손가락에 끼려니 골무가 커져야 했다. 볼품없는 모양새지만 어머니는 끔찍이도 골무를 아끼며 오래도록 썼다. 한번 만들면 손때가 묻고 바늘귀가 찔러 해질 때까지 사용한다. 골무를 낄 때면 마치 잘려 나간 손 마디를 대하듯 했다.

-열 놉도 이놈 하나 모가지를 못한다닝께.

저녁을 먹고 나면 장롱 속 반짇고리의 바늘과 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농사철이 끝나고 옷을 껴입어야 하는 겨울철엔 바느질거리가 더 많았다. 어머니는 잠들어 있는 자식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구멍 난 양말을 깁고 해진 무릎에 천을 덧대며 밤을 보냈다. 어머니에게 한땀 한땀 바느질은 가족과 사랑을 잇는 엄숙한 의례였는지도 모른다. 기운 양말이 더 따습다고 달래며 신겨 주던 꺼칠한 손. 살갗에 스치던 나이론 감촉이 지금도 아픔으로 남는다.

어느 해 겨울. 우리 형제를 올챙이 떼처럼 아랫목에 눕혀 놓고 어머니는 윗목에서 바느질하고 있었다.

-낭중에 봐. 그려두 이것 덜 중에 큰일 할 놈이 나올 티닝께.

옆에서 새끼를 꼬던 아버지가 한 말이다. 바늘귀에 찔린 골무가 무수한 밤을 밀어냈다. 단 한 번도 바늘이 되어 보지 못한 어머니는 평생 우리들의 골무였다. 수없이 찔리며 손가락을 품는 골무처럼 우리를 자신이 만든 골무 속으로 넣어 주었다. 오롯이 골무인 채 어머니의 삶은 쉼표 없이 마침표를 찍었다.

어머니는 늘 뜨거운 국을 드시면서 시원하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뜨거운 국물이 시원하다고 느꼈을 때, 우리 형제들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날 밤 아버지의 바람처럼 큰일을 할 만큼 크지 못한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마음이 짙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남보다 더 잘나야 한다는 자만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바늘이랑 실이며 가위까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 것처럼 형제들도 그럴진대, 서로 잘난 맛에 살았다. 두부 자르듯 등 돌린 채로 곰살맞게 대하지 못했다.

요즘은 형제들 간에 서로 연락마저 뜸하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얼굴을 보면 서먹서먹할 정도다. 코로나 시국에 제각기 살아가기 벅찬 탓이려니 생각하지만, 마음 한편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형제라도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는 언제나 바늘이었던 것 같다. 골무 속에 숨어 바늘을 키운 채 찌르기만 한 삶. 찌르기에 급급해 단 한 번도 골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에게 골무를 끼울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바늘을 밀어 넣은 적이 많았다. 뾰족한 것을 보면 바늘 생각이 난다. 그 뒤를 골무가 따른다. 온통 일그러진 모습으로. 아픔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늘에 찔리는 아픔을 골무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내어 주어 손가락을 감싸고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아물지 못할 상처는 없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굳이 상처를 만들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골무가 되면 상처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더 바둥거려야 여물어질까. 얼마나 더 찔림에 설움 받고 나서야 골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또 하루가 계절의 문턱을 소리 없이 넘는다. 싫은 것이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리움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그냥이라는 말이 있는 게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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