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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민 본보 편집국장

공무원의 상징이었던 ‘숙직’을 이젠 여성에게도 부과하는 시대가 왔다.

소위 ‘양성 통합당직제’라 이름하는 규칙이 제주도를 시작으로 출발하여 세종시까지 올라왔다. 겉보기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경계를 허물어 양성평등의 국면을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실 어딘지 모르게 뒷머리를 긁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이슈는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만 손해를 강요해왔던 암묵적 관습들을 깨부수고 여성에게도 남성이 독점하던 이익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왔다. 이러한 방향이 순방향이었고 이러한 방향과 진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로 인해 여성이 누리지 못했던 보편적인 권익을 찾아주는 것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방법이 위치적으로 남녀의 차별적 레벨을 줄이는 방편이라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성들도 그간 여성이 겪어왔던 사회적 차별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사회적 반응에 대해 험한 표정을 지으며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임금의 평행적 수준 확보가 가장 대표적인 양성 평등의 구호였고 남성에게도 육아 휴직을 주는 것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육아라는 가사를 전담하던 여성에게 남성의 조력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선물하라는 뜻이기에 여성을 위한 정책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유리하도록 뭔가를 더해주는 방식으로 양성평등을 추진하고 집행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양성평등 이슈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당연히 열외됐던 곳에서 역시 남성과 같은 역할을 강제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꽤 오래전부터 여성 징병제를 주장하는 단체가 나타났으며 아직은 반대가 조금 높은 수준이지만 여성들 쪽에서 찬성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결국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전투병) 군복무에 여성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징집’될 날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숙직’도 매우 유사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다. 야간에 텅빈 회사나 청사를 지켜야 하는 숙직이라는 업무 특성상 여성은 물리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기에 힘겨울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회적 동의가 있었기에 여성은 숙직에서 대체로 열외였다. 그러나 여성 공무원의 비중이 높아지고 남성과 여성의 임금 격차가 공직사회에서부터 거의 좁아진 상황에서 일정 부분 희생이 강요되어야 하는 외박형 숙직을 남성 집단이 단독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맞추고 난 뒤에는 뭔가 저울추의 수평이 맞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양성 평등은 도리어 남성이기에 손해를 감수해야했던 부분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했다. 같은 수준의 흉터가 있는 경우라도 성별에 따라 등급을 다르게 인정해 온 관련 법령이 정비된 것이다. 관련법 시행령에 따르면, ‘외모에 현저한 흉터가 남은 여자’는 7급이지만 ‘외모에 현저한 흉터가 남은 남자’는 12급이다. 5등급이나 차이가 난다. ‘외모에 흉터가 남은 여자’는 12급이고 ‘외모에 흉터가 남은 남자’는 14급이다. 이런 등급 차이가 상해보상액의 차이를 낳아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행정안전부가 관련 규정을 ‘외모에 현저한 흉터가 남은 사람’은 7급, ‘외모에 흉터가 남은 사람’은 12급이라고 바꿨다. 여성의 등급은 유지되고 남성의 등급이 여성과 동일한 수준으로 상향되는 것이다. 평등이 구현되었다고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일면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차별’과 ‘구별’의 개념을 숙고하지 않고 기계적 정중앙에서 갈등을 처분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공직 사회가 이러한 양성평등의 정책적 판단 영역에서 기계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 역시 갈등구조에 대한 심오한 판단과 나름의 가치를 담은 생각이 있겠지만 양립하는 가치의 대결적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중앙을 선택해 일을 처리하고 문을 닫는다.

남자와 여자는 차별의 대상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집단을 아무런 구별도 없이 사회적으로, 의학적으로, 가정적으로, 법적으로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등이라 간주해 주기 어렵다.

차별하지 않되 역할은 서로 구별해 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태초부터 인간 세상에는 질서가 있었고 그 질서의 정중앙에 남녀의 구별이 존재해 왔다. 남과 여가 서로 어느 한쪽이 우등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그 사이에서 인격적, 존재적 차별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역학적인 구별은 있어야 건강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임금이나 승진에 대한 차별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기 위해 우리 사회가 힘을 합쳐야 하지만 남녀의 능력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역할이 다르기에 구별해 놓았던 것을 차별로 몰아가는 것은 ‘쫌’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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