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한정규 칼럼ㅣ

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늦은 여름 고향을 찾았다. 내 고향은 산간 마을이라서 언제 보아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20세기 후반 이후 하천이 썩어 쾌쾌한 냄새에 시뻘건 물속엔 시꺼먼 오물덩어리가 군데군데 쌓여 발을 들어 넣기가 싫었다.

어렸을 적 유리알 같이 맑은 물속에 송사리 떼 몰려다니고 돌 틈새 이곳저곳에는 크고 작은 붕어가, 매기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렇듯 전국 어디를 가도 하천들은 병들고 썩어버렸다. 그 썩은 하천을 보고 쓴 시가 있다. 비록 내 고향 하천과는 거리가 먼 서울의 동북쪽을 배경으로 <중량천 아리랑 시집>을 펴낸 김경식 시인의 시다.

김경식 시인이 맑고 깨끗했던 당현천이 변하고 또 변한 모습을 보고 쓴 시다. 당현천은 불암산에서 발원 연촌벌판을 가로 질러 흘러내린다. 아름답고 깨끗하기만 했던 당현천이 주변 개발에 밀려 옛 모습을 잃었다. 옛 모습이 사라져버리고 오염으로 얼룩진 볼썽사나운 것들이 다시 그 옛적 모습을 찾아 복원된다는 말을 듣고 쓴 시라고 했다.

한 때는 환경을 했고 지금은 문학을 하는 내게는 인상이 깊었다. 그래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속 너무 내논다는 핀잔에/ 불암산 등에 둔 바위 모천에서/ 연촌벌판 가로 질러 온 물길/ 생태복원공사로 굴레를 벗고 하늘 본다.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 밀려와/ 햇빛 보지 못 하고/ 시멘트 천川이 되어/ 지렁이 같이 이름 잊고 산/ 한풀이로 달빛보고 파/ 관념에 젖은 수십 년 만에 생태 천으로/ 복원된다는 소식에 신이 난/ 플래카드가 춤춘다.

별빛 부러워 한 것이/ 찰랑거리는 물 주름뿐이랴/ 논병아리 둥지 틀고/ 야생화 너울거리면/ 고향 떠난 물고기 떼 몰려오는/ 꿈에 젖어 기억 끄집어낸다.

문학하는 사람은 김경식 시인과 같이 환경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환경을 하는 사람 또한 문학을 알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보다 쾌적한 환경도 아름다운 시도, 인간미 넘치는 산문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필도, 즐겁고 흥미로운 소설도, 희곡도 쓸 수 있다.

환경부는 문학의 중심에서, 문학가는 환경의 큰 틀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노력했을 때 목적하는, 보다 쾌적한 환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구에는 ‘첫째, 의식주에 대한 욕구. 둘째, 성에 대한 욕구. 셋째, 사치와 낭비, 화려함과 명예에 대한 욕구가 있다.’ 라고 그리스 철학자 에피크로스가 말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되에는 세 가지 욕구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첫째 의식주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위 세 가지 욕구 외도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살 욕구가 있다.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살 욕구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환경파괴를 막아야 하고 파괴된 환경을 복원하여야 한다.

한국만 해도 1960년대 서울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공단이 세워지면서 대기, 수질, 토양 등 환경이 급격하게 오염됐다. 그 후 그 무엇보다도 쾌적한 환경이 새로운 욕구로 나타났다.

그 일에 문학가들이 앞장서야 한다. 또 환경정책당국도 그런 문학인들을 도와야 한다. 이런 일련의 것들이 환경인과 문학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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