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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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학기자
오만학기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제 몸에 불을 붙이고 죽어갔던 한 청년을 기억하는가. 하나뿐인 생명을 불사름에 내어주면서까지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고자 했던 그 청년을. 이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전태일 열사시다. 차별 받고 천대 받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아까운 청춘의 삶을 뒤로하고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열사의 값진 희생으로 인해 이후 한국의 노동환경은 전환기를 맞게 됐다. 언론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노동실태를 고발했으며, 노동운동이 탄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환경 개선’이라는 국민적 ‘아젠다’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열사의 분신사건이 오늘날 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40여년 전 그 때와 같이 커다란 국민적 반향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한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너무 비관적일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까운 청년의 죽음엔 잠시나마 애도를 표하겠지만 그렇다고 국민적 반향으로 까진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 “정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제 업보”라는 분위기일 듯하다. 그간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됐던 몇몇의 노동운동 사건을 보도하는 주요 일간지의 보도행태를 미뤄 짐작해 볼 때 그러하다. 일명 ‘조·중·동’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추종언론들은 노동운동에 대해 ‘강성노조’, ‘귀족노조’, 심지어는 ‘북의 사주를 받은 정치세력’ 등 원색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건 대표적 사회적 약자들로 인식되는 수많은 대학생들의 인식 또한 앞선 자본언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책 『우리는···』의 저자는 이런 아이러니컬한 현상들의 원인으로 연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자기개발서’를 꼬집는다. 자기개발서, 자기개발의 논리가 청년들로 하여금 사회적 약자를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이 아닌 ‘사회진화론’의 잣대를 들이대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불합리한 조건은 그만큼 성실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의 결과이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것, “내 시작은 미약하고 비천했지만 죽을 만큼 노력하면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의 20대를 그 누구보다 냉혈한 괴물로 만들어버렸다고 설명한다.

기득권은 사회적 계급을 계속적으로 양산한다. 이어서 그것을 자기개발 논리로 정당화한다. 그리고 주입한다. “네가 받는 차별, 그동안 성실하지 못했던 네 업보니 감당하라.”, “청춘은 원래 아픈 것이다. 모두가 다 아프니 엄살 피우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면 안 아프게 된다.” 계속된 주입의 결과로 청년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게 된다. ‘성골-진골-6두품’이라는 뼈다귀 논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이 양산한 차별을 청년들이 수용하고 그것을 사회에 투입하고 사회는 그런 여론을 수렴해 다시 정책으로 산출하는 기가 막힌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골이 되지 못한 자는 자연적으로 개뼈다귀로 낙오되고 결국엔 퇴화를 겪게 된다.

저자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무엇보다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을 촉구한다. 20대 스스로가 비판적 수용과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른들에겐 “어쭙지 않은 감성팔이 위로를 당장 그만 둘 것”을 요구한다. 정말로 이십대를 사랑한다면 그들이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청춘은 아플 수 있다. 그러나 아프니까 청춘은 아니다. 이런 말들은 ‘청춘이 아프게 된 구조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리라. 우는 아이 면전에다 “우니까 아이야. 아이들이 우는 건 당연한 거란다.”라고 위로한들 우는 아이를 멈추게 할 순 없지 않은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그리고 청춘들아, 기죽지 말자. 우리 탓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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