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영희의 미술세계ㅣ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인재 강희안(1419-1464)은 시인•화가•서예가로 안견, 최경과 함께 삼절로 일컬어지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그의 전서와 예서, 팔분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기에, 중국의 명필이었던 왕희지와 조맹부에 견주어질 정도였다. 강희안의 서체는 1445년 세종 때 주조한 옥새에 ‘체천목민영창후사’의 여덟 글자를 새겨 넣을 때 쓰였거니와, 조선 금속활자 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을해자의 활자도 강희안의 글씨를 토대로 삼았다. 이런 사례만 봐도 그의 드높은 경지를 짐작할 만하다. 또한 그의 시재는 위응물과 유종원과 비견된다는 평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외의 분야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어 소소한 재미를 더해준다. 동생 강희맹이 증언하기를, 그는 평소 식물을 가꾸는 것으로 소일했다고 한다. 이런 취미 생활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을 지어, 꽃을 가꾸는 일을 경륜에 견주어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그림은 어떠한가?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진 <고사관수도>를 보면 심원한 경지를 엿볼 수 있다.

<고사관수도>는 강희안의 말년인 1460년대에 그려진 풍경화이다. 중국 명대 절파 화풍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대 조선의 주류를 차지하던 안견의 화풍은 중국 북송화의 영향을 받아 산수의 기세는 웅대하지만 인물은 매우 작게 그려졌기에, 강희안의 이런 화풍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강희안의 파격은 조선 말기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기에, 같은 이름을 가진 <고사관수도> 그림이 다수 그려지기도 했다.

 

먹을 듬뿍 적셔 두껍게 표현한 바위와 제멋대로 헝클어진 넝쿨,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 작품의 무대이다. 그림 중앙에 자리한 선비는 바위에 팔을 괴고 엎드린 채 수면을 바라보는데, 마치 바위와 한 몸인 것처럼 편안하게 보인다. 수면을 완상하며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산수는 고절한 실력으로 그려졌으나 결국에는 배경일 뿐, <고사관수도>는 인물에게 초점을 두는 대담한 구도를 채택했으며 분명하게 강약선을 이용하여 옷자락을 묘사하였다. 그림 전반에서 그 세련미가 가감 없이 드러나고, 실로 일가를 이룬 자의 풍류가 그윽하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화가들로 알려진 함윤덕, 이경, 김명국 등은 모두 강희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과언이 아니며, 이후 조선의 산수화는 경치의 비중을 적게 하고 인물의 비중을 늘리는 ‘소경산수인물’ 화풍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강희안이 스스로 그림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애석할 지경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한 선비는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홍진을 모두 잊고 자연과 동화된 허허로운 선비의 모습은 강희안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한 것일 테다. <고사관수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림 속 선비가 마치 나 자신인 양 느껴진다. 한적함과 여유로움이 심상을 가득 채운다. 이 그림은 진정한 쉼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성찰하게끔 해준다.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이나 그것을 묘사한 절묘한 작법, 화가가 담아둔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동은 우리에게 마음의 위안을 준다. 번잡한 세상일로 피로한 심신을 달래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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