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을 읽고 생각해 본 극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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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학 기자
오만학 기자

우리 안에 팽배해진 ‘극단주의’에 대해 생각해본다. 주류에서 벗어나 특정한 무언가를 주장하려 할 때, 우리는 간혹 극단주의에 빠지곤 한다. 특히 사회적 문제를 꼬집고자 할 때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르러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실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젠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부정성을 과하게 부풀려, 듣는 이로 하여금 심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다 볼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수신자가 그 어떠한 여과장치 없이 이러한 극단주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때에 있다. 이럴 경우 그는 역시 극단적인 주장을 금과옥조로 받고 편협된 사고관에 갖히기 십상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선 이러한 극단주의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책은 인류에게 육식의 종말을 선언할 것을 감히 요구한다. 육식을 지금에라도 끊지 않으면 인류에겐 머지않아 거대한 재앙이 닥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1). 토지와 식량의 부족’과 ‘2). 인류의 건강 문제’를 들고 있다. 책에 따르면 지구상의 12억 8천 마리의 소들은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급증하는 인구율에 비해 인류의 삶의 터전은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난데없이 급증한 소들이 인간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들이 미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생산되는 전체 곡물의 70%를 먹어 치운다는 사실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은 지금까지도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데 말이다.

또한, 육식에 대한 인간의 강한 욕구로 인해 축산업자들은 단기간에 상품 가치가 있는 가축들을 가급적 많이 생산해내야 했다. 자연스레 가축을 살찌우는 데에 편법이 등장하게 됐다. 값싸고 방부제가 많이 들어 있는 사료, 심지어는 가축의 찌꺼기를 원료로 쓰기도 했다. 인간의 식탁에 올릴 가축의 질을 보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료를 먹고 자란 고기를 먹을 때 벌어지게 될 재앙이 예고된 셈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인류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다. 인류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가축이 오히려 인류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심지어는 인류의 양식에도 침범하게 된 사태에 대해 우리는 절대 침묵해서는 안 된다. 급속도로 불어난 가축의 수로 인해, 그리고 도축행위로 인해 인류의 생명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결코 좌시해선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육식을 전면 금지하는 발상으로 접근하는 건 아니다. 너무 나갔다. 채식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육식을 할 때에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행복함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과유’는 ‘불급’하기 마련이다. 문제가 있다고 해체하고 그 권리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은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충분한 논의와 토론을 통해서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육식의 종말을 노래하다 자칫 인간 행복권 추구의 종말로까지 귀결되는 건 아닌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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