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서영숙의 미술세상ㅣ

서영숙 안산환경미술 협회 회장
서영숙 안산환경미술 협회 회장

2차 대전의 파괴력은 엄청나게 났으며 세계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나치는 상상력마저 학살하려 했고 예술가를 핍박하였다. 전쟁 중 나치를 피해 뒤샹, 샤갈, 칸딘스키, 달리 등 당대에 유럽을 대표하던 많은 예술가는 미국으로 가게 된다.

이후 예술의 중심은 유럽에서 서서히 미국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잭슨 폴록이 있었다.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은 미국 와이오밍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측량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예술 고등학교에 다녔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런 그가 1943년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페기 구겐하임,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평론가 로젠버그를 만난 것이다. 페기는 폴록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집을 구해주고 매달 일정한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또 한 편 1943년 폴록 개인 전시회를 열어 주어 뉴욕 미술계에 공식 데뷔하도록 도와주었다. 페기의 후광 덕분에 폴록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폴록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 처먹었어." 데뷔전에서 실망한 폴록은 별안간 피카소를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폴록은 피카소를 존경했고, 두려워했고, 결국 저주했다.

 

1948년 제작된 작품<no. 5> 폴록도 스스로도 말했다. "나는 캔버스에만 들어가면 무슨 짓을 하고 나오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한마디로 그의 작품에선 형태가 완전히 해체돼 버렸다. 그래서 제목도 붙여야 의미가 없다. 마치 빙하가 온실효과에 의해 형체가 해체되어 사라지듯 말이다.

1950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드립 페인팅’ 작품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바닥에 놓인 거대한 캔버스 위를 오가며 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그의 혁신적인 그림을 본 대다수 사람은 당혹스러워했으며, 혼란을 느꼈다. 해석이 필요했다. 평론가들이 나설 차례였다.

폴록을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은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다. 그는 폴록을 만나기 전까지는 피카소가 영웅이었으나 폴록을 만난 후 그린버그는 폴록과 그의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예술의 미래라고 선언했다. 또 다른 스타 평론가 로젠버그는 그린버그와 달리 폴록의 그림의 중요성보다 ‘행위'에 중점을 뒀다. 화가의 고민, 에너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등 예술가의 운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봤다.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폴록의 작업에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폴록의 '행위'를 예술로 승격했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을 이해하려 했고, 누구의 이론을 적용하든 폴록은 혁명가였다.

오늘날 폴록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꼽힌다. 작품 한 점이 1,800억 원에 팔리기도 했다. 폴록은 우리나라 미술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예술가지만, 여전히 그가 남긴 그림은 쉽지 않다. 물감 자국으로 가득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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