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영희의 미술세계ㅣ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아파트에 알뜰시장이 서는 날, 잡화를 늘여져 있는 파는 매대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모조 보석을 점점이 달고 금칠을 뒤집어쓴 두꺼비가 동전을 물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다 시선을 잡아끌어 한 번은 쳐다보고 피식 웃게 하는 두꺼비였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일컫는 ‘삼원삼재’ 중 삼재의 한 명으로 꼽히는 심사정(1707~1769)이 그린 <하마선인도>는 중국의 선인에 기원을 둔 것이다. 거대 제국인 당나라가 쓰러지고 혼란했던 10세기 무렵의 중국에, 유현영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하북 출신으로 16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당시 군벌 중 하나였던 유수광의 재상으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던 중 정양자라는 도인이 내방하여 엽전과 계란 10개씩을 교차하여 쌓아 올려 위태위태한 형상(누란지위累卵之危)를 만들고는 높은 지위와 많은 복록을 지닌 당신의 처지야말로 이 형상보다 더 위태하다는 가르침을 준다.

도인의 가르침을 받은 유해섬은 재산을 나눠주고는, 관직을 버리고 전국 각지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악 화산이나 종남산 같은 영산에서 수련에 힘써 내단술과 신선술을 익혀 높은 도력과 기이한 행적으로 ‘유해섬’이라는 별호로 유명해졌으며, 얼마 뒤 전진교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조사로 손꼽히기도 했다. 으레 전설적인 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통력과 관련된 일화를 유해섬도 가지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수천 리 떨어진 세 곳에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분신술과 두꺼비와 관련된 일화들이다.

두꺼비를 타고 먼 곳을 오락가락한다거나, 두꺼비를 마음대로 부린다거나 하는 것 등이다.

하마선인도는 바로 그 유해섬 선인과 두꺼비를 묘사한 그림이다. 봉두난발과 맨발에 거적때기 같은 누더기를 걸친 채로, 히죽거리면서 엽전을 꿰어서 세 발 달린 두꺼비를 희롱하는 찰나인 것이다. 세 발 두꺼비는 삼족섬이라고 하여 중국에서도 신성한 영물로 여겨졌으며, 이는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복전함 아래에도 삼족섬이 숨어 있는데, 이 녀석을 만지면 길하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금까지 덧붙여지면 어떨까. 소위 금삼족섬은 재화가 쏟아져 들어오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세 발 두꺼비와 선인을 그린 하마선인도는 현세구복적인 성향을 담은 길상도라고 할 수 있다.

하마선인도는 시원하고 호방한 필물법으로 화가의 들끓는 듯한 필력을 보여준다. 뒷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다. 선인의 옷은 두꺼운 붓을 써서 갈필로 채웠다. 이에 반해 선인의 복색과, 부릅뜬 눈, 팔다리를 이루는 선 등은 손톱으로 그은 것(지두화)처럼 날카롭다. 이런 선의 대비는 그림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해 주며, 화가의 파격적인 개성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조선 남종화의 거두로 조선 후기를 빛내는 화가인 심사정은 불우한 가족사를 가졌기에, 평생을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조상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벼슬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뼈대 있는 명문가 출신임과 동시에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심사정에게 있어, 그림은 자신의 불행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을 것이다. 막막한 현실을 마주한 심사정은 두꺼비와 선인을 매개로 하여 복을 빈 것이 아니었을는지.

심사정의 개인사는 불행했지만, 그것 창작의 동인으로 작용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의 걸작들을 보고 감탄하게 되었으니 역설적인 일이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루도 붓을 쥐지 않는 날이 없었다’라는 그의 묘지명은 역경 속에서 태동한 그의 그림들이 불멸의 작품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두꺼비가 그렇게 영험한 동물이라고 하니, 한 장 개성을 펼쳐내어 그려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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