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교육칼럼ㅣ

정인숙 교육학 박사, 특수교육 전공

현대미술가 조영남의 미술전시회가 경기도 양평에서 6월 4일 개막한다. 이 전시회에서는 조영남의 ‘제2회 사망 장례식’ 퍼포먼스도 함께 열린다고 한다.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장례식은 ‘그림 대작(代作) 사건을 겪으며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가짜 장례식을 통해 삶을 되짚어보고, 죽음의 순간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고 본다. 인간은 대부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고비에서 진짜 죽음을 맞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 죽음을 우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을까? 언제 불연 듯 찾아올지 모르는 나의 죽음을 위해 가짜 장례식으로 죽음연습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죽음연습은 역설적으로 삶의 기쁨을 배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1993년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엉켜진 생각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처럼 건강한 사람이 왜? 오진이 아닐까?’ 라는 ’부정‘의 단계부터 시작하여 ’왜 하필 나에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아직 할 일도 많고 매일이 바쁜 사람인데? 아이들도 어린데 나보고 어쩌라고?‘ 분노와 비통함, 억울함의 단계로 이어지고, ‘암의 정도가 초기나 중기라면 죽지는 않겠지. 의학이 발달했으니 일류 의사를 잘 만나면 수술이 잘 될 수 있을거야!’ 하며 스스로 타협하는 단계에 이르고... 그러나 끊임없이 ‘죽을 수 있다’라는 우울감이 지배하고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하는 감정은 지속적으로 순환되어 흘렸다. 어린 자녀들이 있는 현실 앞에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 부당하다는 생각과 함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수용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죽으면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영혼에 대한 사후세계의 두려움은 또한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라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에 잠을 청하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음으로 가면 어떨까? 만약 이 밤에 죽는다면 어떤 미련이 가장 클까? 하는 생각을 해 볼 것이다. 삶이 고단하다보면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영원히 잠을 잘 수 있다면 오히려 평안한 안식이 될 것 같아서 때로는 ’죽음이 ‘위안(慰安)’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악착같이 이루고 싶었던 일들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닌 남의 몫이려니 하고 버려둘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음’은 일순간에 그동안 사랑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간다. 말도 할 수 없고, 생각을 전할 수도 없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도 없고, 아꼈던 물건을 숨길 수도 없고, 숨기고 싶은 일들도 숨길 수 없고, 내 물건에 다른사람이 마음대로 손을 대도 말릴 수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도 없고.... 죽음은 그렇게 슬픈 것이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너무나 공평해서 그 누구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슬픈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병이 들어 죽는다면 예고된 시간이 조금이라도 주어질 수 있지만, 사건 사고에 의해 죽는다면 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아 온 세월이 있는데, 내가 노력해서 쌓아 놓은 소중한 것들이 있는데,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 헤쳐지기는 것은 너무 서글프다. 그래서 ‘죽음 연습’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맞이하기 보다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놓기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과 더불어 봉사나 배려 등도 병행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고 고귀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당장 눈을 감고 숨이 멎는다 해도 평소 내가 추구해 왔던 삶의 방식이 존중 되고 평소 말해 두었던 대로 나의 죽음 뒤에 후처리가 된다면 그래도 덜 외롭고 죽음의 순간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3가지 후회는 첫째, ‘참을 걸’, 둘째, ‘즐길 걸’, 셋째, ‘베풀 걸’이라는 말이 있다. 행복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자 하는 욕구와 더불어 인간 내면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실현욕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해인 시인의 ‘6월의 장미’ 중 ‘누구를 한번 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라는 싯구가 있다. 좀 더 성숙(成熟)한 삶을 위해 한번쯤 나의 ’죽음‘ 퍼포먼스를 실행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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