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아버지가 휴가 나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본다. 아버지의 치켜 선 눈은 여동생이 내려 받은 듯하고 나는 아버지의 입술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또 살면서 닮아진 것일까.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두 분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반듯하게 가르마 탄 매무새 고운 이 여인은 몇 년 안에 옆의 휴가 군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 후로도 50년을 신산하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체 그냥 단아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음력 3월 초이렛날이 부친의 기일이다. 해마다 기일이 오면 최첨단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은 영정 앞에서 그가 사셨던 60∼70년대 방식을 충실히 재현해서 음식을 준비한다.

자정이 되어오면 정갈히 의복을 갖추고 누님이 겨우내 말린 생선 건어물과 과일로 홍동백서(紅東白西) 상을 차린다. 부친이 좋아했다던 담백한 백김치를 놓고 고기와 나물 옆에 산적을 올린다.

수원 제수씨와 성남 동생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당신 종손이자 제주인 아들 진하가 조선종이에 현고학생부군신위 지방을 써 모시면 다음 순서로 더운 메(밥)와 갱(국)을 올린다. 그런 다음 유세차(維 歲次) 축문을 외우고 건제순으로 이배 삼배를 하고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한다.

유세차 모월 모시 이배 삼배, 이런 ‘찬란한 겉치레’는 요즘 사람들이 보면 고루하고 한심한 풍경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이런 절차를 건너뛰거나 줄이 지 않는다.

성결교회 집사이기도 한 어머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오셔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제사상을 참견해 주었지 ‘하나님께 예배로 대신하자 그래야 천국 간다’라는 말은 절대 아니 하셨다.

그 자신 40대 초반에 일찍 지아비를 하늘로 보낸 아쉬움을 자식들이 메꿔주는 것이 대견스러웠을 것이고, 일 년에 부친과 자식들이 만나는 유일한 날이어서도 그리 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만 더 쓰고 글을 매듭짓 고자 한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후반에 군에 입대하여 전방 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한 살 때라고 하니 나라는 생명체는 세상에 나올 꿈도 안 꾸고 있을 때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군대를 안 가려고 버티다가 지서 순사한테 잡혀서 입대를 했다고 한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젊은 청년들이 군대를 안 가려고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군대를 간 뒤에도 이 핑계저 핑계 대면서 도망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경우 한 번의 기피를 거쳐 입대를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도 한 동안 더 복무하여 합계 7년의 세월을 군에서 보내고 제대를 했다고 한다.

군대 가면 거의 죽는다는 한국전쟁 시대에 전사하지 않고 우리 집안 최초의 병역 필자가 되어 귀가한 아버지의 ‘무사 제대’와 관련한 한 가지의 일화를 독자께 전해드리겠다.

김 씨 집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무사히 제대하자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조부님이 10일 열흘 동안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 온 동네 사람들을 위해 술고기 잔치를 벌였고 채무 탕감 및 머슴에게도 세경을 올려 주는 등 실로 통 큰 구휼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다소 부풀려진 것으로 의심되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이 ‘전 설따라 삼천리’ 같은 야사는 지금 동네 사람들 입에서 ‘김 생원 댁의 매우 훌륭한 일’로 평가받는다. 돌아가신 아버 지가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망외의 기쁨을 주고 있으니 이것이 왈 조상의 은덕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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