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으로 좋은 길을 가자(正覺大道)

윤화섭 : 천정배 국회의원 특보

천정배 국회의원 전 사무국장

인터뷰 약속시간은 1시였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한 중년 신사가 맞아주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인터뷰를 하기전 1시간여동안 필자에게 좀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배려가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경우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야 하나?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려는 윤화섭(49) 특보의 인간적인 면을 좀더 알고 싶어졌다. 사전대화시간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듣는 그의 살아온 세월과 가치관이 마치 편안한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중략)

끝까지 함께 가는 길

안산 천정배 국회의원의 사무국장을 지내고 현재 특보로 활동중인 윤화섭씨. 그가 오늘의 천정배 의원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숨은 공로자라는 사실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철저히 인간관계의 원칙을 지키는 윤특보는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 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지방 행사 때 천정배 의원의 대리인으로 참석 시

“천정배 의원를 대신하여 온 의원님의 특보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천 의원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이러한 태도는 천정배 의원의 이미지 관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중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천 의원의 지역 일들을 윤화섭 특보가 늘 점검하고 챙기며 자신이 행할 일이나 보고사항을 빼놓지 않는 성실함이 안산에 천정배 의원이 항상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화섭 특보가 96년 스포츠용품을 하고 있을 때 국회에 출마하기 위해 내려온 천정배 의원을 처음 만났다.(중략)

외로운 소년

윤 특보의 고향은 전남 고흥 도덕면 오마도이다. 섬 5개가 말의 형태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1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집은 동네에서 많이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는데 바닷가의 모래, 갯벌의 게나 소라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더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중략)

아버지는 배 한 척을 가지고 어업을 하시는 어부였다. 3남 1녀중 장남인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으며 많은 일들을 도와야 했다. 공부도 우등생이었던 그는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니다 광주상고를 합격하여 광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시절 광주상고는 고교에서 일등급에 속했기에 가족들의 기대 또한 컸다. 아버지는 은행가가 되기를 원하셨다. 당신은 바닷바람 맞으며 허술하게 살지만 아들만큼은 양복을 입고 번듯한 은행에서 근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램은 이루어주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부천에 있는 주식회사 흥양에 취직하였다. 각종 전자제품을 생산하여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근무를 하던 중 86년도에 자회사인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안산의 나노전자에 파견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안산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가족으로는 부인 허영분 여사와 아들 윤원 군과 딸 윤정 이를 슬하에 두고 있으며 아버님을 모시고 있다.

주식회사 흥양에서 근무하면서 아내 허영분 여사를 만났다. 처음엔 직장 동료로서 지냈으나 하나의 사건으로 아내를 보는 눈이 새롭게 되었다. 총무부에 근무하던 중 돈을 잃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아내가 책임지고 그 일을 해결하였다.

“조그마한 체구에 어떻게 저런 배짱있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 참 대단하더라구요. 남자들도 사실이 본사에 알려질까 노심초사하며 눈치만 보는데 나서서 해결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어요.”

지금도 아내는 수영복 코너를 운영하면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윤 특보가 보좌관으로 일하면서는 집안의 살림은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 되어버렸다. 웃으며 말하면서도 부인의 수고로움을 무척 안쓰러워하였다.

“나중에 늙어서는 정말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그동안 고생한 것을 다 보상해 주어야 할텐데... 그래서 마지막 꿈은 아내와 여행다니는 거예요.”

그의 바람처럼 황혼의 멋진 노부부가 되었으면 하는 기원을 해 주고 싶었다. 이야기를 듣는 도중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그는 자녀들이 바르고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훈도 정각대도(正覺大道) 즉, 바른 생각으로 좋은 길을 가자이다.

그의 아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였다. 아들이 중3 여름방학 때 17일 여정으로 전남 해남 땅 끝에서 부산까지 일주를 하였다. 7일은 절에서 스님들과 참선하며 무언, 무행의 수행을 하였다.(중략)

고난과 시련도 나의 몫

윤화섭 특보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도무지 어려움이 없이 즐겁게만 일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자신의 일들에 있어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는 소탈함이 그런 느낌을 필자에게 준 것은 아니었을까? 해서 질문을 해 보았다.

“이제껏 살아오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없으셨는지요?”

예상외로 금방 답이 나왔다.

“우리 천정배 의원께서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옮길 때 그분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와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이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실제로 행사장에서 막말을 하곤 했죠. 그러한 것들을 다 받아주고 서로 대화하고......”

윤특보의 얼굴이 순간 어두어지더니 이내 자신의 도의원에 출마한 이야기를 했다. 2002년도에 그는 도의원에 출마했으나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제껏 해 왔던 이미지가 좋아서인지 모의 투표에서 당선 1위가 매번 저였죠. 나 자신조차도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떨어졌죠. 아무리 근소한 차이라도 패자는 할 말이 없는 거지요. 좀 더 내 자신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어요.”(중략)

기쁨도 자신의 일보다 남을 잘 되게 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는 윤화섭 특보. 그는 첫 인상만큼이나 정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안산 시민과 함께 하고 싶어요!

그는 지구당이 공식적으로 폐지 된 것에 못내 아쉬움을 보였다. 중앙에서는 지구당을 물먹는 하마 역할이라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만을 보고 하는 소리라고 했다. 실제로 지역민과 직접 대하는 것은 지구당에서 하는 것이다. 지구당을 폐쇄시켜 놓으니 지금은 중앙의 일들을 몰라 지역민들의 문의사항을 들어도 제대로 답변 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역민을 대표해서 대변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곧바로 지역민들과의 의사전달이 될 수 있지요.”

그는 자신은 논리적이고 틀에 짜여진 것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편안하게 이젠 시민들과 한층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친근하면서도 열심히 하는 그런 모습이 분명 안산 시민들에게 정겹게 다가와 그가 가장 즐겨 쓰고 좋아하는 우리 함께해요! 바로 윤화섭 특보와 안산시민의 우리 함께 해요! 라는 구호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기대해 보며 넉넉한 그의 환송을 받았다.

(글:윤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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