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아주 청명하고 따뜻했다. 서울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로 아침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벤치 위에 놓인 신문 호외를 보고 밤새 무슨 일이 벌여졌는지를 알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간밤에 탱크를 몰고 나와 정부청사를 비롯한 국가 주요시설을 점령하고 새벽 5시 중앙방송을 통하여 구데타를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대부분의 시민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을 들은 경우는 드물었다. 이 때부터 이 나라는 경제건설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한 세대 이상의 지루하고도 치열한 싸움판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내각책임제 아래서의 국무총리 장면은 며칠이 지나도록 행방이 묘연하였다. 아마 반란군 측에서도 장면을 잡으려고 백방으로 뛰었을 것이다. 장면은 얼마 안 지나 혜화동 수녀원에서 은신 중 체포되었다. 장면은 주미대사를 지낸 철저한 친미파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4.19학생혁명 덕택에 졸지에 권력이라는 돈지갑을 줏었지만 국민이나 여론은 안중에 없었다. 주한 미국대사가 시키는 대로 국정을 요리했다. 장면이라는 사람이 조금만이라도 여론을 수렴하고 귀를 기울일 줄 알았더라면 저 악독한 군사정권의 등장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란군(이른 바 혁명군)은 불과 3천600명에 지나지 않았다(서중석 교수 주장). 그들은 처음엔 장도영이라는 친미장교를 수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소문은 달랐다. 박정희라는 육군 소장이 실세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밑으로는 김종필이라는 예비역 대령이 장자방 노릇을 하는 것으로 당시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서울대 학생회는 어느 날 그를 대강의실로 불러 연설을 들었다. 조조처럼 생긴 그는 군인치고는 제법 말을 잘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남아 있다. 구데타를 저지른 예비역 장교의 한계는 너무나 뻔했다. 학생들의 질문공세가 거세지자 중앙정보부장인 그는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갔다. 그 때 학생들은 역시 학생일 따름이었다. 군인들의 흉계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나중에 김종필을 학교로 불러들인 꾀돌이 학생은 혼쭐이 나야 했다.

요즘 박정희를 놓고 이런 말 저런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백락청이 그를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유능한 CEO’였다고 우회적인 평가를 내리자 오만가지 잡새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놓고 있다. 이 문제라면 모두가 진지한 자세로 과거를 정확하게 조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제일주의가 과연 성공한 것인가, 경제개발계획은 그의 독창적인 정책인가 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의 성장일변도 정책은 마침내 IMF 구제금융시대를 초래하였다. 고 조동필 교수는 박정희 생존시 그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낭떨어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며 한국경제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한 바 있다.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장면시대 얼개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장면은 이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멸망했고, 박정희는 그 그림대로 한국경제를 끌고 갔을 뿐이다. 더구나 미국이 그것을 강력하게 원했고, 밀어 주었기에 가능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큰 사건치고 미국의 개입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판단이다. 군사구데타에서부터 80년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어느 것 하나도 미국의 직ㆍ간접적 영향력이 보이지 않는 구석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국운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을 중국과 일본의 영향 아래서 살아 온 탓일 수도 있다. 다만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은 미국의 눈으로 보면 ‘걱정투성이’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도와 주었더니 이제‘너는 너, 나는 나’라며 등을 돌리려 한다고 섭섭해 하는 모양이다. 우리 민족은 예를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이 좋은 일을 한다면 누가 미국을 멀리 하겠는가. 오히려 지나가는 미국인을 불러들여 시원한 냉수라도 한 잔 권할 줄 아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앞으로 미국은 박정희같은 변절경력이 분명한 친미파를 자기들 뜻대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문영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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