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장근(KIOST 울릉도 독도해양과학기지 대장)

독도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에서 직선거리로 220km,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떨어져 있어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그 형상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 오키섬에서 약 160km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수면위의 겉모습은 동도와 서도 2개의 주섬과 32개의 부속도서 및 5~6개의 암초를 포함하는 총 90개의 해수면 돌출부로 구성돼 있으며 총 면적은 약 187,554평방미터(약 5만평)이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이면 동해는 한국해가 되지만, 일본이 독도를 차지하면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고 만다. 그런데 일본이 독도를 차지하게 되면 한국은 동해바다 전체를 잃게 되고 동쪽이 막히면서 국력이 매우 쇠퇴해져 일본이나 중국에 편입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일본이 독도를 장악하게 되면 독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연결돼 일본의 해양을 통한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은 크게 늘어날 것이고, 미국과 연합한 일본이 더욱 커진 국력으로 중국·러시아와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동해와 동아시아의 질서는 매우 긴장된 상태로 바뀐다는 말이다. 일본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명분을 만들어 우리의 영토를 침략해왔으며, 지금도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미 국제적으로 독도가 한일간의 영토분쟁의 대상지역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명분은 축적되어있는 것이고,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한, 우리는 최악의 경우인 일본의 군사적 침략 가능성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역사속에서,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렇게 중차대하고 엄중한 해양영토 침탈의 현장에서 자기의 목숨을 걸거나,인생을 바쳐서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1500년전, 신라 지증왕의 명을 받아 우산국을 신라영토로 만든 ‘이사부’로부터 시작하여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수많은 이유중에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댈 수 있게끔 만든 인물이 ‘안용복’이다.

그는 조선시대 공도정책으로 바다나 섬에 대해 하찮게 여겼던 시대에 힘없고 초라한 민초신분으로 1693년과 1697년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일본으로부터 자국 국민들의 울릉도, 독도 출입을 금지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이로인해 사실상, 1905년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간의 분쟁을 그치게 했던 영웅이다. ‘홍순칠’은 1953년 울릉도 청년 45명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1956년도까지 독도에 머무르면서 일본의 독도침탈에 맞서 독도를 수호하고, 동도 바위벽에 ‘한국령(韓國領)’을 새겨 넣은 ‘열혈남아’ 였다.

‘최종덕’은 1964년에 독도에 들어와 1965년부터 움막집을 짓고 어부로 살다가 1981년에 독도 최초 주민으로 전입하여 정식으로 독도 주민이 되었고, 1987년 사망할 때 까지 독도에서 살았으며, 현재의 독도주민 ‘김성도’, ‘김신열’씨 부부는 ‘최종덕’씨와 함께 해산물을 채취하여 독도에 살아오다가 1991년 11월에 주소지를 독도로 옮겨 정식 주민이 되어 ‘서도’에서 살고 있다.

여기에 빼놓을수 없는 분으로 ‘일본이 독도를 한국땅으로 인정하는 일본의 실증적 역사자료’ 등 수천점의 고증자료를 내놓고, 정부의 지원도 거의 없는 가운데 울릉도에 들어와 초대 독도 박물관장을 지낸 경기 화성 출신의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이 있다.

이밖에도 울릉도·독도 뗏목탐사의 주인공 이덕영씨, 일제 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독도에서 물질했던 해녀들과 어부들, 현재 진행형으로는, 독도 경비대원들, 독도관리사무소 직원들, 울릉도·독도 해양과학기지 대원들, 그리고 독도 수호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바로 독도를 지켜왔고, 독도를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고 애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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