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어릴적부터 어른들께 배웠고 족보(族譜)에 기록되어 있는 나의 고향에 대하여 살펴보면, 선대 할아버지가 전주(全州)에 살아서 전주를 본관(本貫)으로 한 이(李)씨이다.

이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 전주는 기록되어진 최초의 고향이다. 그 후 삼척에 살았으니 강원도 사람이요, 만주와 이어지는 함경도로 이주했으니 변방사람이며, 서울로 입성하여 왕권을 잡고 종반(宗班)이 되어 중앙의 실세가 되었다가,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게 쫓겨서 울진으로 숨어들어 평민으로 위장하여 터를 잡아 대대로 살았고, 거기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니 기록에 남아 있는 최종 고향은 경상도 울진이다.

아마도 한국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한 고향의 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렇게 보면 고향이란 곳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사연으로 모여든 사람들끼리 터를 잡고 동네를 이루어 정붙이고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고향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세속을 떠난 승려에게는 특별한 고향은 없다. 그러나 당장 내일 떠난다 하더라도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 주인으로 살아간다. 며칠 전 큰스님께서 근황을 묻기에 “요즘은 ‘수리산 폭발물처리장이전 안산시민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옛날 임제선사께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참 주인이 되고, 우리가 서있는 곳 모두가 참 진리> 이라 했으니 수행자로서 지역정서를 잘 살피고 옳은 일이면 당연히 동참해야지” 하시면서 격려를 해 주셨다.

‘수폭처 이전문제’는 워낙 오래 전부터 거론되었던 일이며,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뚜렷한 결실을 보지 못해 홍보용 일회성운동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지금의 서명운동 또한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결성된 ‘수폭처 이전 시민연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주인이 되어 지역현안문제를 해결하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자’라는 공감대에서 출발했으며, 이러한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곳에서 자손들과 이웃들이 함께 정을 나누며 고향을 만들어 가겠다는 순수성을 보태어 새로운 시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21세기는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정체성 확립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안산은‘신개념 계획도시의 대명사’‘개발논리로 만들어진 안산’‘객지 사람들이 모인 타향의 도시’‘문화와 전통이 빈약한 도시’라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개발과 경제적인 이유로 75만명이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역사적 사실의 재정립으로 안산의 전통성을 찾아내고, 21세기에 걸맞는 문화를 형성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앞으로 안산의 시민운동은‘후손에게 물려줄 새로운 고향’만들기라는 인식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안산의 바람직한 발전을 걱정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들의 의식변화를 통해서 폭발물처리장과 같은 행정편의적 발상과,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행정이 사라지고, 시민들의 생각이 정책에 반영되고 납부하는 세금이 시민들의 편의와 이익으로 환원되는 정책을 이끄는 사람들이 정신적 정치지도자로 추대받아 시민과 함께 할 때 진정한 지방자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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