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부설 아카데미서 번개 철가방 조태훈 대표 밝혀
자장면 배달조차도 변하는 고객의 요구 파악이 경쟁
철가방에서 스타강사로의 변신도 끊임없는 학습결과

본지 부설 안산시CEO아카데미 82번째 강사로 번개 철가방에서 스타가사로 변신한 조태훈 번개반점 대표를 초빙해 한양대 게스트하우스 11층 에메랄드홀에서 강연을 가졌다. 번개 철가방으로 잘 알려진 자장면 배달의 고수인 조태훈 강사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어려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조태훈 강사는 중국집 배달원으로 생활하면서 인생을 고민하다 중국집 사장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가치관이 변했다. 삶의 목표가 설정된 조태훈 강사는 군복과 군화에 번개머리띠 등을 두루고 안암동 고려대 일대를 누비고 다니며 일명 ‘번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가 수업시간에 실전 마케팅 강의를 맡긴 후 신문과 방송을 타면서 유명인사가 됐다. 현실에 안주하며 주어진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조태훈 강사의 진솔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인생역전 스토리를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주>

지난해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29개까지 늘어났던 체인점을 모두 접고 강의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하지만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자장면인데 이를 놓고 살 수 없어 2012년 다시 중국집을 시작했다. 태풍은 불어도 철가방은 달린다는 말을 다시 실현하게 됐다.

어린 나이에 가출해 고려대학교앞 중국집에서 17년간 배달 일을 했다. ‘번개’로 불리며 고대의 명물이 되자 자연스럽게 가게도 번성하게 됐다. 마케팅의 핵심은 맛이 아니라 사람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배달을 나간다. 주업은 강사고 배달은 부업이다.

세월이 변한만큼 고객들의 요구도 끊임없이 바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할머니보쌈과 놀부 보쌈의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다. 1979년 가내수공업이 밀집된 청계천에서 문을 연 원할머니보쌈은 연료 보급인 원활하지 않아 삼겹살 문화가 번성하지 않았던 당시 서민 최고의 음식으로 각광받았다.

특히 양을 많이 주고 양질의 배추를 사용하는 원칙을 고수하며 입소문을 통해 지금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신림동 작은 골목에서 시작한 놀부보쌈 역시 성공 비결은 사람이다. 당시 신림동은 팔도에서 모인 고시생들이 즐비했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그들이 즐겨찾던 음식이 바로 보쌈이다.

그들이 나중에 출세해 고생하며 어려운 시절 먹었던 보쌈의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기 시작하며 놀부보쌈도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의 국제적인 행사를 치르면서 국민들 삶의 질이 향상됐다. 2002년 월드컵은 새로운 응원문화를 탄생시키며 시위문화도 각목 대신 촛불을 드는 형태로 바뀌었다.

국민들은 대접받기를 원했고 대기업의 마케팅 전략도 고객만족으로 바뀌었다. 1997년 IMF를 겪으며 웰빙문화가 대두됐다.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음식점에서도 재료의 투명성이 중요해졌다. 총각네야채가게가 유기농이란 고급화 전략으로 성공한 것도 이런 트랜드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국제행사 치르며 새로운 트랜드 형성

자장면 배달을 가서 김치를 꺼냈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무조건 중국산이라며 안 먹는다고 하더라. 중국집 김치는 중국산이란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다. 단가를 맞추려고 저렴한 중국산을 쓰는 곳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런 선입견을 바꾸지 못하면 어렵다. 그래서 배달을 한다.

배움은 비록 짧지만 번개란 별칭으로 잘 알려진 나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관심을 가졌다. 그 교수가 자장면을 한그릇 시켰다. 그릇 찾아가려면 다시 와야 하는 상황이라 다 먹을때 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교수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냐고 물으며 구체적인 사례를 물어봤다.

보통 학생들은 양을 많이 달라고 한다. 곱빼기 같은 보통을 달라고 한다. 난 그 말을 주방에 전달만 할 뿐, 양은 전적으로 주방의 몫이다. 그래서 주방이 아닌 내 재량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여러 명이 자장면을 시키면 한 그릇에 담고 젓가락과 그릇을 줬다. 어떤 학생은 많이 먹을 것이고 어떤학생은 적게 먹겠지만 양을 많이 달라는 요청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배달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학생 3명이 자장면을 시키며 돈이 5천원 밖에 없다고 1천원 외상으로 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월급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1천원 외상을 주기는 좀 어려웠다. 그리고 돈도 4천8백원 뿐이었다. 당시 자장면 보통은 2천원 곱빼기는 2천3백원이었다. 그래서 곱빼기 2개를 3그릇에 나눠 담아 달라고 주방에 부탁해 배달해 줬다.

교수가 또다시 물었다. 어떤 행동에 학생들이 감동을 하는지. 한 학생이 김치를 얻으려고 중국집을 찾아왔다. 종업원 입장에서 김치를 내주기는 눈치가 보이고 그래서 셀프로 먹도록 담겨진 단무지에 고춧가루와 파를 넣어 무쳐 줬더니 너무 맛있게 먹고 감사해 했다. 그 후에도 단무지를 얻으러 오면 라면은 일반 단무지를, 술 안주로는 깨를 뿌린 프리미엄 단무지를 줬다.

철가방강의 거절했으면 변화 없었을 것

교수는 지금까지 한 얘기를 학생들 앞에서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소비자행동론 수업 시간에 10분만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거절했다면 내 삶도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생들 앞에 서서 40분을 떠들었다. 잘 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보고 주문을 하면 사장도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배달하면서 학생들의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 학생들의 행사나 일정은 대부분 대자보에 붙이기에 이를 열심히 들여다 봤다. 관심만 가졌을 뿐인데 학생들과의 관계가 바뀌었다. 물질적인 서비스 제공은 사장의 몫이다.

그렇게 학생들 앞에서 얘기를 마쳤고 며칠 후 교수가 찾아와 정식으로 특강을 요청했다. 고려대 경영대학에서 명예강사로 위촉해줬다. 쟁쟁한 강사들이 모여있는 상황에서 교수도 큰 모험이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위상을 높이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문제다. 근성을 소유하지 못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활용가치를 생각하지 못한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 10여명과 종종 보는데 이중 4명만 결혼을 했다.

300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지만 여전히 고시원 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다. 내 일이 아니란 생각에 자신만의 비전을 설정하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전문성과 기술이 필요하다.

배달의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손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그것이 재주문의 핵심이다. 중국집 고객은 전화번호만 가지고 음식을 주문한다. 전화가 6대인 중국집도 있는데 주변에서 폐업을 하면 그 번호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과 서비스가 동일하기에 오히려 고객에게 불신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이 업계를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탈취제로 음식 냄새 없애며 이미지 개선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중국집 배달원은 평균 250만원에서 280여만원을 주는데도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 피자나 치킨 배달은 시급이나 주급을 받지만 중국집은 월급을 준다. 이는 젊은 세대에겐 구속으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집 메뉴판이다. 유산슬 작은 것이 2만5천원이다. 하지만 이를 주문하면 오직 유산슬 밖에 먹을 것이 없다. 그 정도 금액이면 삼겹살 2인분에 무한리필되는 야채와 밑반찬을 먹을 수 있다. 중국집 메뉴는 분식집보다 많다. 3만원이 넘는 해삼탕은 35년 동안 10개도 팔지 못한 것 같다. 메뉴가 많다 보니 주방장을 두고 재료를 항시 준비하기 때문에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황을 탓한다.

고객의 수요를 잘 파악한 것이 퓨전 중국집이다. 메뉴를 간소화하니 재료는 신선하고 레시피가 완성돼 누가 만들어도 같은 맛을 낸다. 인건비 또한 절감된다. 또한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 거리로 나오게 된다. 변화하지 못하면 경쟁력은 떨어진다.

강사로만 활동하다 저렴하게 나온 중국집을 인수하게 됐다. 내가 뛰면 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에 상가 형성도 안돼 주문도 적었고 광고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보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전략을 세웠다.

배달 갈 때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음식 냄새를 없애기 위해 탈취제를 소지하고 다니며 뿌렸다. 좋은 이미지가 소문이 나면서 주문도 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많은 것을 감안, 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수타를 직접 볼 수 있도록 운영했다. 또한 주문을 한 가정의 아이 이름, 강아지 특징 등을 파악해 주문을 하면 이를 거론하며 친근감을 보였다. 고객도 놀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매출이 100만원 가까이 늘었다.

주변 운동장에서 일요일마다 야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정수기 물을 꾸준하게 제공했다. 그랬더니 24만원이나 되는 첫 주문이 들어왔다. 물 몇 병으로 말이다. 그렇게 주말도 꾸준하게 매출 200만원을 넘겼다.

오토바이 게시판 고대 명물로 자리잡아

번개라는 별명은 종업원 시절 활동한 고려대 캠퍼스에서 자장면 배달이 잘못되면서 우연히 만들어졌다. 중국집에서 멀리 떨어진 국어교육과에서 시켰는데 착각해 가까운 국문과로 배달을 한 것이다.

때 마침 국문과 학생들이 주문 전화를 하러 간 사이에 음식이 도착하자 주문하자마자 번개처럼 왔다며 생긴 별명이다. 이후 학생들 사이에선 주문하고 담뱃불을 붙이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내 행동 하나하나가 이슈가 됐다.

배달하는 오토바이에 게시판을 만들었다. 학교 곳곳을 누비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광고가 쇄도했다. ‘자장면 먹기 집중 강조 기간’등의 문구를 달고 다니며 재미와 호응을 얻었다. 또한 다양한 손님 유형, 메뉴 소개 등으로 재미를 줬다. 그리던 중 서비스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많아 상대가 부담 갖지 않고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자장 베스트5였다. 음식별로 포인트를 부여 가장 많은 포인트를 차지한 5개 과에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 그랬더니 그 포인트를 따먹기 위한 족구대결이 펼쳐질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오토바이 게시판은 항상 학생들의 궁금증을 몰고 다니며 그들과 교감하는 루트로 활용됐다.

사회학과에서 3천원에 구입한 티셔츠를 우연히 입고 배달을 나갔는데 큰 홍보효과가 있다며 이 역시 이슈가 됐다. 이후 30여개가 넘는 티셔츠가 협찬으로 들어왔다. 축제에도 지역 대표로 섭외되기도 했다. 데모에 초청받기도 했고 고.연전에 깃발들고 주경기장을 돌기도 했다.

배달이 가게를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켰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 중 배달을 다녀오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자신을 쉽게 대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돈 주고 사먹는 것인데 나이는 상관없다. 그냥 고객일 뿐이다. 다른 가방을 들고 다니지만 같은 고대를 다닌다는 것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껴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았다.

처음 방송에 출연한 날 내가 일하던 중국집이 재료가 떨어져 4시에 문을 닫을 정도로 엄청난 효과를 봤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나 16평 가게에서 35평으로 확장했고 상호도 설성번개반점으로 바꿨다. 배달 직원도 3명에서 7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호황은 2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중국집이 잘된다는 소문이 돌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결국 매출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직원을 줄이는 구조 조정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함께 일하자고 데리고 온 친구들을 바쁠때 써 먹고 버리는 같아 맘이 편치 못했다. 괴로운 마음에 술 한잔 먹고 출출해 24시간 운영하는 우동집에 갔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9시면 문을 닫던 중국집을 24시간 운영하며 구조조정 없이 2교대로 직원을 활용해 매출도 꾸준히 상승했다.

비록 남들 눈에는 하찮아 보이는 배달이지만 그것이 가게를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켰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관심을 갖고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일과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포인트다. <정리:유돈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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