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영희의 미술세계ㅣ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그림은 내게 있어 나를 말하는 수단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은지는 담배 향의 보전과 방습을 위해 은박을 입힌 종이를 말한다. 은지를 긁어 그림을 그린 것을 은지화라 한다. 송곳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그려낸 후, 그 위에 물감을 바르고 헝겊으로 닦는다. 이 과정을 통해 선이 주는 느낌이 특히 도드라지는 작품이 탄생한다. 대한민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이중섭의 독창적인 기법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이중섭은 군부대의 쓰레기장에서 양담배나 초콜릿을 포장하는 은박지를 찾아내곤 했다. 전통문화에서 관찰되는 상감 기법이나 은입사 기법을 응용하여, 은지에 무늬를 새기고 안료로 메꾸어 넣었다. 그렇게 하잘것없이 버려진 무생물에 예술적 감성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낙원의 가족>은 부식된 철판과 같은 느낌을 주는 표면을 배경으로 삼았다. 흐릿하게 누런 색감의 선은 은지가 담뱃갑 안에 접혀 있을 때 생겨난 것이다. 이중섭이 그어낸 선 자국들은 거칠면서도 유연한 동세로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답답하기보다는 경쾌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보기 드문 표현 기법이 여러 모티브와 어울려 독특한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가족을 중심으로 나무, 꽃, 새, 나비, 복숭아 등 그가 평소 즐겨 그렸던 소재들이 요소요소 배치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는데, 이를 통해 꿈결의 이상향에서 행복해하는 가족의 모습이 연출된다. 가족과 함께 평화로이 사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았던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중섭은 이 그림을 1955년 개인전에 전시하였는데,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아서 맥타가트가 <낙원의 가족>,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신문을 보는 사람들>의 은지화 3점을 사들여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를 통해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하던 뉴욕에서 이중섭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궁하면 통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마땅한 종이가 없어 은지를 화폭으로 선택했던 것이 그의 독창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재료의 특성을 잘 살린 은지화를 여럿 남겨, 일회적인 시도가 아닌 새로운 장르로서 발돋움하게 했다.

<낙원의 가족>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여유롭고 담백하게 한다. 순수한 소망에서 뿜어지는 긍정적인 기운 때문일까? 그림이 지니는 특별한 힘을 잘 보여준다. 그의 그림과 상반되었던 그의 인생이 주는 울림이 먹먹했기에, 아련히 맴도는 그의 희망이 내게는 또 다른 희망으로 번져간다. 사뭇 가벼워지는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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