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한정규 칼럼ㅣ

한정규 문학평론가

조선 고종 때 무능한 왕실과 당파싸움을 하느라 일본 등 주변국으로부터 겪어야했던 민족의 서러움을 보다 못해 자신이 태어난 집터에서 자결한 민영환을 되돌아본다.

정치인들의 무능을 지켜보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국민들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를 100여 년 전에 견주어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1895년 고종 32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놈 폭도 손에 왕궁의 옥호루에서 살해 송림에서 불사라 졌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민영환을 러시아로 보내 조선에 차관을 제공하고 왕실 수비병을 파견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 해 줄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일본의 잔인무도한 횡포는 계속됐다.

결국 1905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지켜 본 민영환은 동년 11월 30일 자결했다.

그가 자결하면서 남긴 유서에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잔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중략·····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형제에게 이별을 고한다.’라고 일본 놈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 된 이후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던 때의 수모에 대해 썼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권문세가에서 태어나 미국, 일본,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188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를 지냈으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대관식에 축하하러갔던 조선의 특명전권공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결한 집터에 혈죽血竹이 솟아났다는 말과 혈죽이 전해지고 있어 그의 충절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관료로서의, 국민으로서의, 가야할 길을 가르치고 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란 특별관계가 있긴 했지만 그가 남긴 유서에서 보인 바와 같이 왕에 대한 충성과 백성에 대한 애족은 남달랐다.

시대적 정치 환경이 많이 변했다고는 해도 민영환과 같은 용기 있는 정치인이 많이 있어야한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 중에는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몸을 내 던질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21세기로 접어 든 요즘 역사의 수레바퀴가 19세기 말로 되돌아 간 것 같아 안타깝다.

국내정치는 마치 16세기 말 선조로부터 파생된 외척 중심 파벌 싸움을 시작으로 이어진 당파싸움에 빠져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일본과 청나라가 시도 때도 없이 조선 땅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다 19세기말 왕실까지 침입 왕비를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자 러시아에 지원 요청을 했듯이 지금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이 패권싸움 양상으로 한반도를 놓고 중국은 한국과 협력분위기로 선회하는가 하면 일본은 위안부와 독도문제 등 과거사를 두고 왜곡 우리나라를 극도로 자극하고 북한은 핵무기개발과 미사일 개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의 우방이자 국방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 또한 일본이 한국과 독도와 위안부문제로 다툼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군국주의 강경파들이 앞장 혐한을 부추기고 그에 동조한 일부 시민들은 우리 동포에 대해 조선인을 죽이자는 등 폭거에 가까운 행위를 끝이지 않고 있다.

그런 동북아 정세를 볼 때 130여 년 전과 100여 년 전의 조선과 민영환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끝이 보이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행태 또한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여야 정쟁도 좋지만 이런 때 일수록 협력과 협동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의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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