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영희의 미술세계ㅣ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예로부터 금강산에는 사찰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특히 내금강 만폭동 어귀에 있는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며, 그중 유일하게 건재하다.

<표훈사>는 조선 영·정조 시대의 화가인 최북의 작품으로, 표훈사와 그 주변의 산세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가까운 산과 먼 산이 거의 같은 선상에서 묘사되었음에도, 먼 산의 아득한 거리감이 두드러져 금강산의 광활한 넓이를 실감하게 한다.

그림 왼쪽 아래에 미점으로 처리된 토산의 모습과, 수직으로 뾰족하게 처리한 먼 바위산의 형상은 진경산수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산봉우리와 나무 같은 자연경관은 세밀한 필체로 표현한 것에 비해, 표훈사의 건물과 다리 등의 인공물은 비교적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또한, 금강산 계곡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는 특히나 활달한 동세가 돋보여, 그 소리가 청량한 푸른빛으로 들려오는 듯한 공감각적 심상을 선사한다.

이러한 수작을 남긴 최북은 파격적인 일화도 여럿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중 금강산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경치의 아름다움과 술에 취하여, ‘천하 명인 최북은 응당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고함을 지르고 구룡연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구조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화가로서도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의 고관대작이 최북에게 그림을 그리라며 무례하고 강압적으로 협박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최북은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라며 스스로 눈을 찔러버리는 과격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결국 그는 애꾸가 되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가장 광기 어린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최북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전하는 이야기 역시 존재한다. 그는 1784년 통신사의 개인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최북이 그린 산수화 한 장을 받아든 일본 승려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최북의 그림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직접 방문하여 구매하는 명품이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큰 명성을 얻었다 해도 언제나처럼 소탈한 멋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를 ‘호생관’이라 지었는데 이는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들의 시선에 쉬이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성정을 드러내는 예로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칭호로는 ‘최산수’와 ‘최메추라기’가 있었는데, 산수와 메추라기를 너무도 잘 그렸기에 붙여진 호칭이라 한다.

광기로 보였을 정도로 자유로이 뻗어나가던 생각. 굴하지 않는 기상과 드높은 자존감. 창작에 목마른 예술가라면, 나아가 자유의지의 끝없는 실현을 꿈꾸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최북을 떠올리며 영감을 받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얽매임이 없었던 그의 영혼처럼, 오늘만큼은 내키는 대로 살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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