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영희의 미술세계ㅣ

김영희 단원작가회 회장

빗줄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대지는 더없이 시원한 풍광을 선보인다. ‘미산이곡’은 조선의 3대 화가로 꼽히기도 하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이 1891년, 그의 나이 49세에 그린 작품이다. 값진 문화재를 수집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사명으로 삼았던 간송 전형필에 의해, ‘이곡산장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된 작품이기도 하다. 화폭 가득히 서정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정감 어린 고향의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수작이다.

무언가에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혼을 가진 장승업은 골짜기를 둘러본 뒤, 안온한 울림으로 마음이 가득 동하여 비로소 화선지에 그 풍광을 담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그려진 ‘미산이곡’이야말로 장승업의 산수화 대표작으로 길이 남았다. 죽계라는 호를 가진 노인의 산장 풍경을 그렸다며, 죽계의 조카가 작품의 발문을 써 내려갔다. 그림이 그려진 내력은 물론, 그림에 대한 감상을 마치 시처럼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더해준다. 죽계와 그의 조카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그림은 가운데에 발붙이고 선 나무들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좌측은 마을을 둘러싼 산과 초목으로 채워져 있고, 오른쪽은 넓은 강이 여백과 함께 완만하게 흐른다. 그림 속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오원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짙은 고목 숲과 둥글둥글한 산봉우리들은 비에 젖어 푸르름을 더하고 있어, 마음을 청량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한편, 강변에는 소를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릿느릿 이동하는 목동이 보인다. 푸른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아낙네는, 일하는 식구를 위해 새참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에 반해, 조각배 한 조각을 띄워놓은 사공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모습이 한없이 한산해 보인다. 마을은 어떤가, 서옥의 선비는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다. 지나간 단비에 따라온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문을 열어 놓은 채로 몰두하고 있다. 안분지족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삶이다.

몽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그림의 배경이 어느 곳에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곡’이란 지명으로 미루어 보아 배나무가 많은 골짜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얗게 핀 배꽃들이 사위를 둘러 달밤을 수놓는 환상과도 같은 풍광이 아니었을까. 혹은 꿈속에서 보게 된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처럼, 장승업이 그린 ‘미산이곡’도 그에 뒤지지 않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숨이 막히는 듯한 도시 생활 속에서, 고즈넉함이 가득한 미산이곡의 풍경을 바라본다면, 그 누군들 마음의 쉼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사 홍진을 털어내고 편안하게 소요할 수 있는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무릉도원일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나마 그림을 통해 영원과도 같은 안식을 누리고는, 물러나서 현실을 살아갈 여유와 활기를 담아 씩씩한 모습으로 집으로 향한다. 그림 속 소를 타고 나아가는 목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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