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신현승 칼럼ㅣ

신현승 자유기고가

지구에는 다양한 기후와 날씨가 존재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찌는 듯한 열대 기후속에 있는 지역, 타는 듯한 갈증만이 존재하는 사막 기후 지역, 모든 것이 얼어붙는 한대 지역 등등이 동시에 지구상에서 펼쳐져 있다. 어느 노래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우리 나라는 축복인지 핸디캡인지 모르겠지만, 계절 자체가 꽤나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그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날씨를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행운권(?)에 당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행운권은 역시나 눈(雪)이 아닐까 한다.

한 겨울에 내리는 눈. 그 중에서도 함박눈은 그야말로 일부 선택받는 국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운권이라 하겠다. 새삼 빡빡한 도시 생활로 인해, 또는 자동차 운행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 눈을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잠깐만이라도 현실적 걱정을 내려놓고 낭만적인 사유의 세계로 빠져보자.

예로부터 눈은 문학에서 정화(淨化)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가까운 시대의 김수영 시인의 눈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교양이 있는 분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필자는 단순히 눈을 정화의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눈은 어찌보면 온갖 더러운 것을 잠시 그 하얀 장막으로 가리는 임시적인 방편일 뿐이며, 그 안의 더러운 것들은 눈이 녹아버리면, 더더욱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필자는 문학도일 때도 단순하게 눈을 정화의 심상으로 보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덮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황의 해결이나 정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닉(隱匿)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저 하얗게 내린 눈이라면 1차적으로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낭만적인 사유를 하자고 해놓고는 어째 가장 비낭만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것 같고, 왜인지 하얗고 예쁜 눈을 좋지 않게 말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사실 눈의 정수는 하얗고 예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꺼리는 모습인, 그 녹음(融解)과 뒤섞임에 의한 그 지저분함에 있다. 하얗게 내린 눈은 썩어야 할 지난 찌꺼기들과 더러운 것들을 단순히 감추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 눈은 그 고결하고 순결한 하얀 결정을 녹이면서 온갖 찌꺼기들과 더러운 것들과 한데 뒤섞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분을 제공하며, 미래의 영양분이 될 것들, 그리고 내년의 씨앗이 될 것들과 한데 뒤섞어 그들에게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예쁜 함박눈은 그 자체로 예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만 그 예쁘고 고결한 모양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예쁘지 않은 모양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하얗고 아름다운 눈 자체를 단순하게 정화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눈 심상의 정수는 그 모양의 일그러짐, 녹음, 더러움과 한 데 섞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정화라기보다는 자기희생에 따른 생명부여로써의 정화의 의미인 것이다.

올 한 해, 다시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우리 사회와 지구촌은 너무나 아픈 일들을 많이 겪었다.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도 모른채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지금도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분명 이 사회의 수많은 상처들과 치부들은 지금도 그 해결점을 모른 채로 노출되어 있다. 작금의 사태로 인해 거리로 내몰리는 수많은 실업자들과 폐업자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추운 거리를 바라보며 하염없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이 사회와 정부는 과연 그들을 하얗게 덮어 그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더러움과 한 데 뒤섞일 준비가 되어 있는 지 나는 묻고 싶다. 그리고, 이 추운 시절이 지나갔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삶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안산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