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기자칼럼ㅣ

신도성 시민기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여럿 있으나 그중에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결정치 못한 것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를 조사하면서 5명의 후보를 선정하고 심의했다. 5명중에는 1902년 발간된 대한제국 애국가의 서문을 썼던 충정공 민영환, 정동제일교회 초대 한인 목사이며 문필가 최병헌, 흥사단 설립자로 일제에 의해 옥사한 도산 안창호, 홍난파를 포함해서 많은 음악가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구한말 당시 작곡자 김인식, 그리고 독립협회장을 지냈고 한영서원 설립한 교육자 좌옹 윤치호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심의 끝에 표결하여 윤치호 11표 대 안창호 2표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애국가 작사자로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결정에 대해서 포기하고 손들어버렸다. 외형적으로는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일제강점기 친일행위가 많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로 결정된다면 부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가 아는 애국가의 가사가 만들어진 시기는 1897년부터 1910년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애국가의 가사 중에 ‘대한’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는 1897년에 세워진 대한제국을 의미하고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만 한반도에서 합법적으로 불러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애국가 가사에 영국 W. 쉴드가 작곡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이라는 곡에 붙여서 사람들은 부르기 시작했다. 이곡은 개신교 교회에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찬송가 곡인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학창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야.’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와 같은 곡이기도하다.

1906년 평양시 계리 35번지에서 출생해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안익태는, 1930년에 일본 동경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미주 동포들의 모임에서 부르는 애국가의 곡이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을 차용해서 부르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동포들이 우리의 손으로 작곡한 애국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알고서 그는 외국 국가(國歌)에 대해서 연구했고 마침내 1935년 11월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를 작곡해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제국 애국가가 독일인 프란츠 엑켈트에 의해서 작곡됐지만 을사늑약으로 인해서 불러질 수가 없었으며, 대한제국과 한일합방 전후 만들어진 구 애국가도 영국의 민요를 차용하였는데 이를 벗어버리고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비로소 우리 국민의 손으로 작사되고 작곡된 애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추후에 확정적인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애국가의 작사자인지에 대한 결정을 유보한다고 했다. 어렸을 때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본 애국가 악보에는 작사자 이름을 적는 란에 미상(未詳)이라는 아리송한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1998년 7월 행정자치부는 정부수립 50주년을 앞두고 다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공청회까지 열었으나, 역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음악계에서 어떤 학자들은 애국가가 한 사람이 작사한 것이 아니고 많은 민중들이 함께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나 이는 작사자에 대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으로 핵심을 비켜간 옳지 못한 접근방법이다. 비록 그분들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애국가 가사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인물이 애국가의 작사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의 어려운 시기에 노랫말이 만들어져서 일제강점기 국권을 잃은 시기에 안익태에 의해서 작곡된 애국가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지금의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의 희망을 불어 넣자. 8월 15일 광복절과 29일 국치일이 함께 있는 이달에 역사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애국가를 우리민족 국난극복의 지표로 삼을 것을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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