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석 경기테크노파크 전략사업본부장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건립 국민추진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공자가 연세 70이 넘어 병에 걸리셨다. 수제자 子路가 기도하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물어본다. 그런 이치가 있냐고? 자로가 ‘하늘 신에게 기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대답한다.

나는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고. 자로의 기도와 공자의 기도는 완전히 다른 관점인데 어떻게 다른지 이글 말미에 설명하려 한다.

기독교 일각에서 코로나19는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인간 말세에 이르러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 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코로나19 퇴치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거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 채 우리는 서로를 험담하여 갈라서기 일쑤인 사회에 살고 있다. 한편 미세먼지를 비롯하여 공해와 자연 파괴는 전 지구적으로 온난화 현상을 일으켰다. 고래를 비롯한 바다 생물이 플라스틱으로 죽어간다.

북극 빙하가 녹아내리고 북극곰은 기아선상을 헤맨다고 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오염된 물로 인해 병을 얻어 하루에 천여 명씩 사망한다. 이런 상황을 만든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으니 코로나19로 벌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더욱 구체적으로 보면 코로나 19가 대한민국에 주는 피해는 막심하다.

기업과 자영업을 비롯하여 문화계, 관광업, 항공업, 체육계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사람과 돈의 흐름이 차단 되었다.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주식이 급락하는 등 경제 공황 상태가 시작된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저축 없이 하루 하루 연명하는 분들한테는 저승사자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그분들은 일용직이거나 파트타임으로 힘겨운 노동을 하는 어려운 생활인데 더욱 심각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결국 전염병 창궐의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몰려 가고 취약계층이 뒤집어 쓴다.

다시 기독교 일각에서 벌어지는 논리로 되돌아가 본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은 그들의 것이라는 복음은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채찍이라는 논리와 모순된다. 가난한 분들이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천국에 들기가 어렵다는 기독교의 서민 중심 시각은 경제가 경색된 상황에선 통용될 수없는 논리다. 극소수 부자들과 안정적 직장인들을 제외한 대다수 서민들은 지옥같이 고통스러운 삶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한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기독교의 박애정신은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공자가 천명한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할 곳이 없다는 말을 비유 삼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도탄에 빠진 빈곤층, 빈민층을 살려야 한다. 국가와 지역 공동체가 나서서 이들을 처참한 생활난의 늪에서 건져 올려야 한다. 초유의 재정 투입으로 기업과 자영업을 지원하고 차별없는 경제 처방약으로 경제를 살려야 한다.

예를 들면 재난기본소득 같은 소화기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급한 불을 꺼야 한다. 병 걸려 죽기 전에 굶어 죽겠다는 아우 성을 방치하는 건 하늘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둘째는 건강한 공동체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고 칭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심각한 재앙을 맞이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정부와 기관과 의료진과 봉사자들의 노력에 감사하고 감사할 일만 남아 있다. 정치권에서 권력을 차지하고자 헐뜯고 비방하는 모습을 닮아선 곤란하다. 그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자가 항상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늘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고 문명인의 덕목을 갖추는 노력을 항상 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에겐 온화하며 자신에겐 엄격한 품성과 올바른 사고와 바람직한 태도를 갖추기 위해 탐구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구비하면 좋겠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모아질 때 우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성취할 수가 있다. 이런 노력을 도외 시하고 방치한다면 그야말로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며 기도를 해봐야 소용없으며 기도할 곳조차 없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공자가 늘 기도하고 있다는 말은 인문정신의 발로이며, 나밖의 존재에 내 운명을 빌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전제 조건인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가치를 수용한 정신이다.

반면 자로의 기도는 인간을 벌하고 구속하는 신적 존재에게 의탁하고 의존하며 공자가 강조하는 인문정신을 망각한 주문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어떤 수준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로를 격려하고 한걸음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혐오와 갈등을 부채질하며 더욱 파열할 것인가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지혜를 모아 우리 사회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대시키려면 하늘(?)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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