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살며 생각하며>

우리가 학창 시절에 정녕 취업의 상위 순번에 올려놓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업종으로서 종합상사라는 것이 있었다.

그 ‘종합상사’와 ‘세계경영’ 두 개의 화두만으로도 70∼80년대를 걸쳐 살아왔던 학생과 샐러리맨들에게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김우중이다. 그가 지난 12월 9일 세상과 작별했다.

다소 쌀쌀한 초겨울 아침, 오늘은 마침 휴일이다. 커피 한 잔 마시며 김우중 또는 그와 유사한 기업인 몇몇을 기억에서 불러내본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화려했던 사람도 인생이란 그저 날씨 맑은 날 잠시 소풍 나왔다가 점심 하나 먹은 다음 훌훌 털고 떠나듯이 그렇게 가는 것 아니겠는가.

당시 학생들이 왜 종합상사를 상위 직업군으로 생각했느냐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때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얻어 급격한 고도성장 그래프를 그리던 시기, 수출의 일선 창구인 ‘종합상사’를 레알 인기 직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우중은 어떤 사람인가. 그를 말하라면 1960년대 후반 ‘대우실업’을 만들어 ‘창조·도전·희생’이라는 모토로 거칠 것 없이 질주하여 국내는 물론 지구촌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개도국 다국적 기업으로는 해외 자산규모 세계1위를 기록하여 한국 경제성장 엔진 일부를 만든 경영인이었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훗날의 역사도 그리 기록하리라 믿는다. 그 ‘대우실업’이 바로 생산과 수출을 패키지로 묶은 종합상사 또는 종합무역상사였다.

「대우」 또는 김우중을 설명함에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다음과 같이 첨언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우」는 늘 수재들만 뽑았다. 그런 다음 ‘대우가족’ 옷을 입혀 세계 곳곳으로 내보냈다. 어떤 신문은 ‘나가 싸워라’라고 했다고 뽑는다.

상사(商社)맨들은 중동으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007가방 하나 들고 발이 닿는 지구마을 처처를 돌아다니면서 와이셔츠를 팔고 냉장고를 판매하고 종당에는 「대우」와 코리아를 매출했다.

그렇게 해서 대우가족은 세계 일류가 되었다. 이것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식 경영 방식이고 그것 그대로 김우중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후 「대우」는 오직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에 맞춰 급성장했고 이후 전자·건설·금융·중공업 등의 업체를 인수 합병하여 삼성을 제치고 마침내 2위에 올라 한국의 재벌 판도를 바꿨다.

김우중은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취준생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러나 이때 단행한 ‘인수 합병’은 훗날 「대우」 몰락에 기여한 주홍글씨가 되고 말았으니 기구한 운명이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1970년대 중반 혜성처럼 나타난 신선호이다. 그의 창업 및 성장 과정도 김우중과 비슷하다.

스물일곱 살 청년 신선호가 단돈 100만원과 타자기 한 대로 오파상 사무실을 차린 지 불과 4년만에 「율산」을 비롯한 14개 계열사에 8천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려버렸다는 이 불가사의한 팩트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 성장의 기반도 바로 중동의 시멘트 수출을 담당하던 종합상사였다. 신선호와 동료들이 서울은 지금 몇 시냐고 외치며 야망의 주춧돌 위에 세웠던 「율산」의 놀라운 성공은 그 이전 「대우」를 필두로 해서 이창우의 「제세」 등과 더불어 고도성장 구가기에 굵은 선으로 이포크(epoch)를 그었으며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살 떨리는 감동을 주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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