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정 한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선생님,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데 저는 왜 이리 이겨내기가 힘들죠? 정말 죽고 싶어요. 마음이 약해서 그런가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불러도 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의 감기라는 말은 우울증에 적당한 별명은 아니지 싶다. 첫째로, 마음의 감기라고 하니 마음이 약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오해가 생기고, 둘째로, 감기라고 하니 감기처럼 저절로, 혹은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인데 의지가 약해서 스스로 이기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잠시 생활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외국생활이 처음이던 터라 비록 큰 문제없이 적응을 해나가고 있긴 했어도 아직은 언어와 음식, 사고방식 등 문화가 다른 곳이니 만큼 사소한 것들로 의기소침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나날들이었다.

어느 햇볕 따스한 봄날 오후, 집근처 초등학교의 운동장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한국인 아주머니 한분이 활짝 웃으며 은발의 외국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아하니 상대방은 전혀 한국말을 모르는 분임이 분명한데도 서투른 영어를 하다가 잘 안되면 한국말까지 섞어가며 스스럼없이 소통을 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 보는 내게도 역시 친근하게 말을 건네었는데 이 마을에 얼마 전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초등학교학교 건물 앞에서 아이들 하교를 기다리던 중 역시 손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학부모 할머니와 초면으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단다. 밝고 활달한 모습이었다.

작은 마을이어서 이후로도 가방을 등에 맨 아이 둘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그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늘 씩씩했다. 그런데 늦가을이 지나면서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늘 셋이서 다니던 길을 초등학생 아이 둘 만이 가방을 매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겨울이 깊어가자 점점 쓸쓸하게 보였다. 무슨 일 일까?

집으로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여는 그녀의 얼굴에 활달한 미소가 오간데 없이 사라져 평소의 그녀 같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서부터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기분이 우울하고 무기력해지더니 집안일조차 하기가 점점 버거워 지금은 그냥 누워있기만 한다고, 이제 고작 4학년인 큰 딸이 아침에 동생의 도시락까지 싸서 학교에 가고 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밖으로 나가기 싫어 제대로 장을 본지도 오래이며 입맛이 없고 속이 늘 더부룩하고 불편하다는데, 잘 먹지를 못하는 듯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었던 오래전 과거를 떠올리며, 꿈을 포기했던 자신을 자책하였으며, 당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던 친정어머니를 새삼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는 편히 살아보지 못한 어머니가 불쌍하고 자신이 자식 된 도리를 못하고 있다며 죄책감을 가지는 모습이었고, 소중했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지고 차라리 죽으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자주 했는데, 아이들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이 또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울증 중에서도 가장 증상이 심한 주요우울증에 해당했다. 치료를 권하자 마음이 힘든 것인데 약을 먹는다고 소용이 있느냐며 반신반의하던 그녀는 권유를 받아들였고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 조금씩 수면과 식욕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좀 더 회복 될 때까지 가사와 아이들 양육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된다는 각별한 당부를 들은 그녀의 남편은 우울증이라는 병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 했지만, 다행히 심각성에 대해서는 동감을 하였으며, 적극 협조를 하였다.

출장이 잦아 가족과 같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남편은 사용할 수 있는 휴가를 앞당겨 내었고 좀처럼 의욕을 내지 못하는 그녀를 격려하여 함께 산책을 나가고 햇볕을 보는 시간을 늘리도록 도왔다. 그녀는 서서히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되면서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낯선 타국에서 남편은 일 때문에 너무 바빴고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해결해야 되었던 상황이 반복되자 힘에 겹고 서운했었다고 했다. 때로는 화도 내어보았지만, 그나마 싸울 틈도 없어 포기하고 나니 점점 할 말도 없어지고 무심하게 지내왔는데, 지난 겨울동안에는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막혔던 말문이 트이는 계기가 되었고 서로의 입장과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어 앞으로는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고 해도 예전처럼 대화의 문을 꼭 닫고 살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얼굴에도 봄이 온 듯 편안한 미소가 피었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마음이 약하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원인으로 볼 때 기분, 식욕, 수면 등의 조절에 관여하는 뇌신경전달물질이 저하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교정해주는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하고, 관련된 내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담치료가 병행되어야 하며, 과도하게 쌓여온 심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해소될 수 있도록 주위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또한, 감기 같이 가벼운 질환이라고도 할 수 없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심신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어 잘 해오던 직업생활, 대인관계,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회복된 후,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고, 좀 더 소통하며 좀 더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분들을 보면서, 삶에서 우울증을 만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우울증을 치료받고 나서 많은 환자분들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선생님, 뭔가 모르게 삶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전보다 더 괜찮아요. 사는 게 재미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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