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런 집 여식이어서 요즘 같으면 당연히 여학교를 다니고 상급학교로 진학했을 터인데 ‘딸’로 태어난 팔자 탓에 무학으로 있다가, 광주에서 내려온 대학생들로부터 야학 강습 몇 자 배운 것 말고는 별다른 공부의 혜택은 받지 못하고 보통집 여식처럼 동생들 업어 키우고 농사일과 부엌일 돕는 처자로 장성하여 중매쟁이 만나 아버지한테로 시집 온 분이 나의 어머니이다.

요즘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머니가 태어난 대일항쟁기 시절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규범이 일상을 탄탄히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랬으니 ‘있는 집’이라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남존여비라는 말이 나와서 한 마디 더한다. 명분론적 질서를 강조하던 성리학이 조선 선비의 품격을 키우기는 했으나 개화 이후까지 그런 질서는 생명력 있게 전승되어 꽤 괜찮은 여인들까지 배움의 뒷줄에 서게 했으니 미풍 도덕 뒤에 가려진 이 민족의 후진성이다.

조선 사회 시스템이 윤리적 정신줄의 사생아인 남존여비라는 몹쓸 잣대를 들이대며 여인의 기회를 강하게 박탈한 결과 당시는 물론 불과 삼사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남녀불평등·남아선호·여성비하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성에게 사회 참여나 지식 축적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참으로 문맹적인 시대였다.

시간은 흘러 어머니 때와는 현저하게 달라진 작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여성들도 지금처럼 균등한 기회를 가졌더라면 국민성을 고려할 때 오늘의 사회가 더 발전되고 보다 서구화된 환경 속에서 살 것이고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하게 되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배우지 못한’ 어머니 최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내 있는 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곤 한다.

그런 불평등한 시절에 태어난 어머니는 당연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읍내에 노인대학이라는 게 생겨서 ‘가갸거겨도 배우고 창가(唱歌)도 배우고 해서 포도시 까막눈은 면한’ 상태다.

치매 예방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면사무소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쓰고 읽고 하세요 하면 그럴 때는 어머니는 의외로 고분고분 잘 따르고 그러면서 나름의 서체를 개발하여 ‘까스집 전화번호’, ‘서촌 큰성님 몇 번’, ‘인천 선미네’ 같은 글씨를 큼지막하게 달력이나 비료 포대에 써놓고 읽는다.

그래서 면사무소에서 날아온 재산세 고지서는 너끈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기억력 또한 수준급이어서 어머니 앞에서 몇 십 년 전 일을 함부로 꺼냈다가는 낭패 보는 수가 있다. 또 그런 사람이 놓치기 쉬운 부지런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못 말리는 어머니다.

이런 분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가끔씩 모친을 닮은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객관적이지만 고집이 세고, 인간을 사랑하지만 잔정은 부족하고, 논리를 찾지만 종종 관념적이고, 앞에서 강한 척하지만 가끔 기만당하는 것들이 어머니와 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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