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 교육학 박사, 특수교육 전공

학교 담벼락에 개나리가 노란 꽃을 피우며 환하게 웃는다. 옆에 서 있는 매화나무의 꽃 봉우리들도 몽글몽글 자태를 뽐낸다. 추운 겨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렇게 예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나? 빨간 꽃, 노란 꽃,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 아무리 감탄을 해도 표현이 모자라다. 이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맞는 봄이 되니 마음도 환해진다.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에서 눈을 가지고 자연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적’이다.

대학시절 같은 과에는 시각장애인 1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80년대에는 대학교재가 많지 않아

주로 영어교재를 사용하여 그룹별로 번역하여 발표하거나 동아리나 과별 활동도 활발하여 대학생활을 즐기느라 바쁘게 보냈다. 대학 4학년 때는 졸업여행을 설악산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에 두 명씩 착석하게 되는데 필자는 시각장애인 동료와 함께 앉았다. 지금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버스로 서울에서 설악산까지 약 3시간 30분정도 걸리지만. 80년대에는 서울에서 떠나 끝이 없을 것 같은 대관령 고개의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서 설악산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약 5시간이상 소요되었다.

긴 시간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창밖의 풍경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어느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데, 온갖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즐비하고, 바위 옆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아주 연한 새싹의 연두부터 성숙할 대로 성숙한 진한녹색의 스팩트럼을 뽐내며 서 있고,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한 바위 사이의 계곡을 따라 계곡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그 위로 5월의 아름다운 태양이 반짝반짝 비치어 영롱하고 찬란한 최고의 조화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이 모습을 말로 설명하고 싶어서 열심히 표현을 해 보았지만, 어찌 나뭇잎의 수백 가지 연연두색부터 진진녹색을 묘사할 수 있으며, 물 위에서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짝반짝 비치는 태양 빛의 영롱함을 설명할 수 있으랴. 언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래도 대학방송국에서 활동도 하고, 평소에 표현력이 좋다고들 하는데, 이 정도까지 밖에 설명을 못하다니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를 인지했고, 자연의 전체를 한 번에 훑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기 다른 꽃들과 나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에는 파릇파릇 새싹의 탄생과 나무에서 피어나는 새순의 새 생명을 보며 마치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빨간 장미를 비롯한 온갖 꽃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고, 가을이 되면 황금들판을 비롯하여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사과, 배, 감나무 등의 결실을 보기만 해도 탐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다.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아주 가느다란 가지부터 굵직한 가지가 구부러지기도 하고 곧게 뻗어있기도 하고, 서로가 안고 있기도 하고, 참으로 기이한 형상으로 서로가 어울려 있는 나무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삶에서의 재 충천이 필요하고, 여행을 통한 쉼에서 꽃과 나무가 주는 에너지는 우리를 다시 일으킨다. 김형석교수는 백년을 살아보아도 ‘그 자리 그대로’라고 표현하였는데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난들 현재보다 특별히 다른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제 완연한 봄이 되었는데 꽃시장에 가서 어여쁜 꽃 한 다발 구입하고, 가까운 산에 가서 봄의 향기를 느끼며 항상 사느라 애쓰는 ‘나’ 자신에게 칭찬과 위로를 해주면 어떨까? 더불어 시각 장애로 인하여 봄의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자연을 보지 못하고 상상만 해야 하는 사람들의 불편함과 아픔을 생각하며, 볼 수 있는 ‘기적’에 감사하는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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