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환<신한대 글로벌통상경영학과 교수>

중국은 매우 특이한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위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은 권력이 한 명에게 집중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 수 없다고 결론처럼 말하는 것도 익숙한 얘기다. 과거 구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은 잘 알려진 일인 권력의 폐해를 보여준다. 북한의 김정은이 있으니 권력의 습성과 그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의 문제를 우리는 더욱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중국은 모택동 일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10년 동안 문화혁명의 혼란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택동의 죽음으로 집중된 권력구조가 변화한 것은 아니다. 베이징을 장악한 등소평은 여전히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했고 그렇게 형성된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그대로 활용하였지만 그 결과는 중국의 운명을 크게 바꿔 놓았다.

역사는 결과를 이미 말해주지만 사실 모택동과 등소평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미리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때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정치구조에서는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폐단도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까지 매우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민주주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등소평 이후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였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중국이 민주주의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이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고려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등소평은 천안문사태라는 돌발적인 상황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배후에 머물러야 했다. 권력이 일인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그 최고 권력자가 생존한 상황에서 새로운 권력이 구성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이 집중된 정치체제에서는 2인자 조차 만들지 않는다.

등소평은 정치 전면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중국은 그렇다고 해서 2인자를 만들 수도 없었다. 권력은 그 형태가 어떻든 출혈을 무릎 스는 경쟁이 동반된다. 물론 권력을 놓고 피 흘리며 경쟁하는 모습은 당시 중국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는 등소평이 배후에서 지속적으로 중국을 통치하기 위한 조치였고 그 누구도 등소평을 대신하여 2인자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임시조치였다. 물론 등소평 사후에 강택민은 집단지도체제 내에서 재량을 허용하는 범위에서 중국을 통치할 기회를 얻었고 이러한 구조는 후진타오까지 존속될 수 있었다. 후진타오는 비정상적인 권력구조 내에서 중국을 통치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진타오를 대신한 누군가가 통치행위를 한다고 할 수도 없는 10년의 임기를 보내야 했다.

하나의 제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의 목적이 달성되거나 상황이 변화하여 그 제도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당초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는 등소평이 정치 전면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중국을 통치해야 하는 이례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중국이 더 이상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운행중인 제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의 효율성에 문제점을 확인해야 한다.

시진핑은 집권 초기부터 반부패 운동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특히 그 이전까지 한번도 한적이 없는 최고위층에 대한 사정작업을 단행했다. 시진핑의 이러한 정치행보는 중국 대중의 지지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이 집단지도체제라는 현행 제도를 반드시 변화시켜야 할 정도로 중국 전체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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