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마지막 재인(才人)으로 존경받아

박해일 발탈 기능보유자

‘탈놀이’ 하면 ‘탈을 머리에 쓰거나 몸에 뒤집어 쓰고 하는 것’을 생각할텐데 발에 탈을 뒤집어 씌우고 하는 발탈은 좀 생소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79호 발탈.

발탈의 재담부문 기능보유자 박해일 지부장(81.국악협회 안산지부장)은 이 시대의 마지막 재인(才人)으로 불린다. 발탈은 연희적 특징이 강한데 인형극적 성격에 가면극의 성격이 가미되어 즉흥성이 짙다. 이 즉흥성은 특히 발탈극에서 재담이 갖는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박해일 지부장은 발탈의 재담부문 기능보유자다. 발탈의 중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1942년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화술과 재담을 사사받았으며 1953년 대한담우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96년 발탈의 예능을 인정받아 이동안씨의 뒤를 이어 발탈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박해일 지부장이 재담꾼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다. 오락시간이면 늘 만담과 재미난 얘기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둘러쌓여 지냈다. 이때 동네에 유랑극단이라도 들어오면 2-3일은 끼니를 거르면서 극단의 흥행물을 훔쳐 보곤했다.

그러다가 1942년 당시 무성영화 변사였던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만담과 재담을 익히면서 재담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하소 선생은 당시 변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이야기만 이끌어 가는 게 아니었어, 열마디 말을 하면 세마디는 웃음을 주어야 하지만 일곱 마디는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거든 그래서 민족 재담이면서 교훈적인 성격이 짙은 발탈과 쉽게 연을 맺게 됐지”

대한담우협(談友協)에서 창립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장님타령과 잔칫집 풍경이라는 덕담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요즘 유행하는 인기 코미디언이나 연예인이 부럽지 않은 시기였다.

“옛날 이야기꾼들은 재담에 풍속이나 사상, 효심 등을 감추어서 전달했지, 말은 재주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전해야 하는 것이지 그래야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주는거야“

재담가에 대한 박지부장의 재담철학은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처음 배울때의 마음 그대로다. 60년 가깝게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선생 전국을 순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안산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생겼다.

일제시대인 1948년 반월면 사무소 앞에서 재담을 선보일 기회가 생겼다. 정확한 집계는 못했지만 면사무소 운동장이 꽉 들어찰 정도로 사람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반월면이 생긴이래 그토록 많은 군중이 운집한 예는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안산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됐고, 안산시 조성당시 예술인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안산과의 연을 지금까지 맺고 있다.

이렇게 재담가의 길을 걷고 있던 박지부장은 고종때 궁중 가무별감을 지낸 박춘재 선생에게 사사한 이동안씨를 알게 되었고 당시 줄광대를 뛰던 이동안씨와 발탈의 전승에 뛰어 들게 됐다. 발탈이 남사당을 통해 일제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원형 복원과 전승에 책임자를 찾고 있던 시기였다. 그후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최초의 발탈 공연을 갖게 됐고 이동안 선생에 이어 1996년 발탈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박지부장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누가 나이 묻는 걸 제일 싫어한다.

사실 팔순이 넘은 지금도 아직 국악협회 지부장직을 맡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박지부장에게 나이는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공감하게 된다.

왕성한 활동 때문인지 실제로 보아서는 환갑을 조금 넘긴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목이 아프다가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신명이 저절로 난다는 박지부장.

지금도 매주 금요일이면 국악협회 사무실에서 대여섯명의 제자들을 가르친다. 그의 제자들은 평균 나이가 60세가 훨씬 넘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다. 그렇지만 박지부장의 눈엔 항상 어리고 부족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 늘 제자들에게 한가지라도 더 전해주고자 국악협회 사무실에 시간만나면 들른다.

아직도 공연이 열리는 무대에서 많은 끼를 발산하고 있는 그는 일년에 5~6차례의 공연을 위해 건강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낮에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주변에선 그가 아예 술을 마실 줄 모른다고 여길 정도다. 한순간의 기분만을 생각해 술을 마셨다가는 자칫 공연장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60여년을 한결같이 지켜오고 있는 생활신조다.

재담과 인연을 맺지 않았으면 아마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었을거란 그는 아직 온전치 않은 발탈의 원형을 찾아내고 복원하기 위해 오늘도 이른 아침 일어나 국악협회 사무실에 출근 준비를 서두를 것이다.

<박공주 기자 princess@ansa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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