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임택 시각장애인 미디뮤지션 CEO아카데미 열강
프로는 자기가 하는 일에 이끌려 기회를 만들어야

임임택(57) 미디 뮤지션, 21살 때 시력을 잃은 그는 오히려 21살까지 시력을 갖게 해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천배의 감동을 주고 있다.

감히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시련을 견디며 아니 항상 감사함이 배어있는 그의 삶은 주어진 환경에 대해 절대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삶을 프로의 삶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는 그다.

항상 프로의 세계를 동경하는 그는 어릴 때 기타 연주에 반해 일찍 기타와 인연을 접했다. 그리고 말보다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프로의 기본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연주를 보여줌으로써 화답은 박수며 박수의 크기에 따라 연주자의 능력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 0.1도 안되는 시력을 갖고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1952년, 6.25전란 끝무렵이라 참으로 비참한 시절이었다고 단정한다.

비참한 시절이란 하루 세끼를 제대로 채울 수 없는 시기라는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프로도 기본이 채워지지 않으면 프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어려웠던 어린 시절, 눈까지 안좋은 유년시절이었지만 모든 것을 단념하고 환경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의 자신이 없었다면서 생각의 전환이 삶에서 100가지가 달라져 보였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한 삶이 보인다

순간순간 생각을 바꾼다면 삶은 언제가 감사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이다.

태어나자 마자 9년간 치료를 받고 머리에만 침을 30대씩 맞는 치료를 했으나 그 이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눈치료는 받지 못했지만 21년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9년의 치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믿는 그다.

선천성 시각장애인보다 색깔의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푸르름을 알 수 있는 시기가 있었기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그는 프로의 인생도 곧 감사의 인생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에게 두명의 아들이 있는 데 큰 아들은 미국에서 어렵다는 토목건축학 박사를 취득하고 조만간 졸업을 하는데 거기에 참석할 것이며 둘째는 3년전 목사 안수를 받아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단다. 둘째 아들은 자신을 인생의 선배로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항상 1년365일 변함없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일어나는 고3같이 부지런한 것을 곁에서 봐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단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곧 내 삶과 행동이 교육이라는 생각임을 강조했다.

그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공동묘지 근처로 이사를 가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기타치는 동네 형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기타를 배우기로 마음먹은 그는 6개월동안 끊임없이 동네 형을 찾아 갔다. 왜냐면 기타를 치고 싶어서다.

프로는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

공동묘지를 넘기를 6개월, 15살 어린 나이에 오로지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런 두려움이 생각나지 않은 채 비가오나 눈이오나 공동묘지를 넘은 그는 다름아닌 무서운 집중력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두개의 눈으로만 보지만 그는 10개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손가락 끝 10개가 그의 눈이다. 10개의 손가락 끝으로 세상을 보니 얼마나 많은 것을 보겠느냐는 것이다.

IQ 147이란 명석한 두뇌를 하느님이 줬기에 학습능력이 뛰어났다는 그는 열심히 공부하니 성적은 무조건 1등이었다.

그러나 9살 때 공동묘지 언덕위의 집으로 이사를 한 그는 생활보호대상자로 대한제분 밀가루 2kg으로 생활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전하던 때라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다 먹고 쓰고 나서 도우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을 도우려면 나의 하나를 포기해야 나눌 수 있다.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려면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하니 여러분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도우는데 있어서 아마추어는 갈등하지만 프로는 고민한다는 것. 그 시기 기타를 배우고 싶은 열정하나만을 가지고 공동묘지를 새벽에 6개월을 넘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다. 6개월 동안 새벽공동묘지를 넘어 기타를 배웠고 그후 기타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한국 최고의 기타맨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목표는 최고, 과정은 최선이어야

비만 오면 귀신나온다는 공동묘지 동네에 살았던 16세 소년의 눈에는 빛이 났다. 1년 레슨을 받고 나니 기타박사가 되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4곡을 연습했다. 연습, 연습, 연습, 또 연습 기타를 칠 수 없을 때까지 연습했다.

손가락에 피멍이 들었다. 붕대를 감고 또 연습했다. 16세에 전국 기타대회에서 2등을 했다. 10년만 더 연습하면 한국 최고, 10년을 더 연습하면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양팔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연습, 연습, 또 연습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꿈이 있으니까. 21세에 실명하여 간절염, 피부염을 앓던 그는 10개의 손가락에 관절염이 걸리고 골다공이 걸린 손으로 연주를 했다. 그에게는 목표가 최고면 과정은 최선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프로는 일을 앞에 두고 불평을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는 자신의 약점을 보지만 프로는 모두 해 낼 것만 보인다.

21세에 시력을 잃고 제일 먼저 점자를 배웠다. 점자가 뭉개질 때까지 읽었다. 손끝에 집물이 날올때 까지 읽고 또 읽었다. 악보를 볼 수 있으려면 3개월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18일만에 악보를 볼 수 있었다. 1% 변화가 100%를 바꾼다.

아마추어는 인생의 기회를 기다리지만 프로는 인생의 기회를 만들어간다. 손끝이 짓무르고 피멍이 들 때까지 연습했다. 그렇게 8년을 연습하니 2천200곡을 외웠다. 눈으로 볼 수 없었기에 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도전, 이것만이 살길이다.

모험이 아닌 믿음을 가져야 프로

점자를 배워 피아노 연습을 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연습에 연습을 했다. 건반소리가 엉뚱하게 들리고 리듬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한번이라도 건반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피아노 건반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피아노 건반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그는 가졌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음이,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음에 감사했다. 성실하게 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가 실명의 좌절에서 벗어날 무렵 찾아온 후배가, 뜻밖에도 나이트클럽에서 같이 연주하자고 제의하면서 150곡이나 되는 연주곡을 외우라고 한 적이 있다.

6개월 동안 안간힘을 다해서 외운 것이 120곡. 다시 찾아온 후배는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곡을 외운 그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어떻게 외웠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사는 길인데 뭔들 못하겠니”라고 대답했다. 그 6개월 동안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점자 악보를 만들고 외우는 데 쏟았다.

그것만이 잃은 줄 알았던 연주자의 생명을 다시 찾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목숨 걸고 외워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일에 과감히 도전하라

어느 겨울 아침,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연장에 가다가 빙판 내리막길에서 45중 추돌사고를 당했다. 우리 차는 폐차할 지경이 되었고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사고로 나는 발목과 다리에 깁스를 해야 했고 아내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한달 이상 입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 날 목발을 짚고 강의장에 갔다.

사고소식을 알고 있던 교육담당자는 생각지 못한 나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 때 “제가 맡은 강의인데 당연히 와야죠”라고 대답했다. 그의 철저한 책임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프로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세는 모든 프로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의무라는 것. 감동적인 말이다.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아들에게 자판부터 배우고 나서 컴퓨터 음악을 익혔다. 점자 교재도 없이 여기저기 묻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연습삼아 만든 곡을 후배가 듣고 나에게 편곡을 의뢰한 것이 미디 뮤지션의 길에 들어선 계기였다.

한번은 외국출국을 앞둔 후배가 두 달 안에 열 두 곡을 편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곡에 열흘 정도 소요되므로 너무나 촉박했지만 나를 믿고 일을 주는 게 고마워서 받아들였다. 하루 열 시간 이상 작업했고 때로는 두 시간밖에 못 자면서 작업한 결과 58일 만에 열 두 곡 모두 완성할 수 있었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수락하고 잠을 충분히 자야하는 베제트병을 앓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주어진 기한 안에 마무리했던 이유는 맡겨진 일에 내 이름을 걸고 충실하게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명은 기회가 있을 때 분명이 같이 와야 한다. 그는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잡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지나간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두 눈을 잃은 그가 오늘날 이렇게 만족스럽게 살 수 있게 된 중요한 계기는 점자학습이었다. 점자를 통해서 글씨를 읽게 되자 기타를 잡고 악보를 외울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30대에 피아노와 조율을 배웠고 40대에 컴퓨터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세계적인 미디 뮤지션의 꿈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차근차근 실천하는 자세는 기회를 만드는 길이 될 것이다. <박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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